애태우지 마세요 서두르지 마세요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주명덕 사진Ⅰ―도시정경》전이 열리고 있다. 주명덕(68)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가에 속한다. 그는 다큐멘터리로 출발했다. 1966년 혼혈 고아들을 찍은 《홀트씨 고아원》전으로 충격을 줬고, 1970~80년대에는 봉고를 몰고 한 달에 6000km씩 전국을 달리며 장승과 마을과 절을 찍었다.

그는 이제 서울을 찍는다.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태어나 6·25 직전 월남했으니 서울은 제2의 고향이다. 그러나 소년 주명덕이 돈암동 집에서 혜화초등학교까지 전차를 타고 달리던 옛 서울도 더 이상 없다. 그는 그런 점에 분개하거나 통탄하는 일 없이, 함께 늙은 양처(良妻)의 일상을 찍듯 담담하게 오늘의 서울을 찍는다. 이번에는 75점을 걸었다.

일산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슈베르트 가곡이 흐르는 빈티지 스피커 앞에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사진은 평생 세 번 변했어요. 다큐를 찍고, 전통공간을 찍고, 요새는 식사하러 가다 혹은 산책을 하다 눈에 띄는 걸 찍어요. 그렇게 된 시점은 홀연히 왔어요. 쉰 어간에, 선승들처럼. 어이쿠, '깨달음'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난 그런 거창한 말이 싫어."

사진평론가 박주석(47) 명지대 교수는 "1989~90년이 주씨 사진의 분기점"이라고 했다. 한라산과 오대산의 산세를 찍던 주씨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발밑의 풀, 길 옆의 꽃을 찍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피사체를 찾아다녔다면, 그 이후엔 '무엇을 찍겠다'고 애태우는 일 없이 자기 앞에 스쳐가는 사물을 서두름 없이 찍었다. 주씨는 "그 순간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왔는데, 나는 그때 속으로 '아, 이렇게 오는구나' 했다"고 말했다.

젊어서 그는 '놀부'라 불렸다. 지인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가차없었던 사람"으로 그를 기억한다. 상대가 선배건 후배건, 주씨는 "그렇게 살지 말아" "그걸 사진이라고 찍었어?" 같은 호된 말을 툭툭 던지곤 했다. 월간지 사진기자로 일하던 20대 시절, 인터뷰하러 간 문화계 명사가 그를 얕보고 까다롭게 군 적이 있다. 그는 "선생님, 제가 어려 뵈지요? 좀 지나면 '주명덕이 나를 찍었다'고 자랑하시게 될 걸요" 했다.

주씨는 "옛날 얘기지" 하고 빙긋 웃었다. "나는 평생 '프로페셔널'로 살았고, 프로페셔널로 산다는 것은 어사인먼트(assignment)를 받는다는 뜻이며, 나는 다만 어사인먼트와 내가 잘 맞아떨어지기만 기대했어요." 최근 한 대학생이 그에게 "그렇다면 어사인먼트 없이 자유로울 때 뭘 찍고 싶냐"고 물은 일이 있다. 주씨는 "어사인먼트가 없는데 어떻게 사진을 찍어? 빨리 군고구마 수레라도 끌어야지" 했다. "내 사진을 원하는 사람이 없다면 단 한 장도 안 찍어. 그게 내 자존심이야." 전시는 내년 1월 18일까지. (02)720-0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