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회 LG배 세계기왕전] 빈 바둑판

〈제1보〉(1~10)=시작을 기다리는 텅 빈 바둑판은 언제 보아도 쓸쓸하고 황량하다. 지난 세월 셀 수도 없이 많은 말발굽에 채이고, 날아오는 포탄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격전의 현장이라곤 믿어지지 않는다. 저 하찮아 보이는 나무 판 깊숙한 곳에 바둑계의 역사가, 승부사들의 애환이, 팬들의 함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 오늘은 또 어떤 기수(奇手) 묘착(妙着)이 361칸 미로(迷路) 위를 춤추며 새로운 살륙의 전사(戰史) 한 페이지를 추가하게 될까.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이창호가 먼저 입장한다. 그리고 자기 자리를 찾아 소리 없이 앉았다. 그는 결코 발자국 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곧이어 야마시타(山下敬吾)가 들어섰다. 선해 보이면서도 얼굴 도처에서 투지가 묻어나는 형(型). 흑백 선택권을 차지한 이창호가 말없이 흑돌 통을 가져간다. 그는 항상 "6집 반이면 흑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텅 빈 바둑판은 또한 상상력의 보고(寶庫)다. 한 점도 안 놓인 백지 공터야말로 온갖 변화와 선택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바둑판은 넓고 둘 곳은 많다"는 프로들의 농담은 사실 정곡을 찌르고 있다. 8로는 참고도 1로 갈라쳐 6까지 틀을 짜는 것도 일책. 야마시타가 얌전한 손길로 10에 걸쳐갔다. 서서히 바둑판에 숨이 붙고 피가 돌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