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절모 청년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이만한 규모와 깊이로 한국 근대미술을 조명한 전시는 전에도, 후에도 좀처럼 보기 힘들 것 같다. 23일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한국근대미술걸작전》이 개막한다.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1886~1965), '한국미술 빅3'라고 불리는 박수근(1914~1965)·이중섭(1916~1956)·김환기(1913~1974), 문인화에서 출발해 동양적인 추상의 세계를 확립한 이응노(1904~1989) 등 19세기 말~20세기 전반기에 한국 화단을 대표했던 작가 105명의 걸작 232점이 전시된다.

주최측은 국내 주요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은 물론, 개인 컬렉터와 유족들 손에 흩어져 있던 작품까지 공들여 골고루 모았다. 최은주 덕수궁미술관장은 "저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죽 늘어놓는 대신, 20세기 초를 살아간 한국인들의 모습을 ▲근대인의 일상 ▲근대의 풍경 ▲근대인의 꿈 등 소주제에 맞춰 아기자기하게 배열했다"고 말했다.

그림 한 점 한 점에 깃든 작가들의 인생 사연이 관람객 가슴을 찡 울리게 한다. 이쾌대(1913~1965)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은 중절모를 눌러쓰고 푸른 두루마기 소매를 걷어붙인 청년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관람객을 쏘아보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경북 칠곡에서 만석꾼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낭만적 사실주의'를 추구했고 6·25 직전에 이 자화상을 완성했다.

그림 속의 그는 자기 앞에 어떤 세월이 닥쳐올지 아직 모르는 35세의 청년이다. 하늘은 새파랗고, 밭고랑엔 초록이 넘치며, 여인들은 붉은 치마를 입었다. 그는 전쟁 통에 조선미술동맹에 참여했다가 국군에게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1953년 남북 포로교환 때 월북을 택했다. 홀로 남은 부인이 오랜 세월 눈물겹게 남편의 자화상을 보관하다 세상에 내놨다.

구본웅(1906~1953)이 그린 〈친구의 초상〉도 관람객 마음을 사로잡는다. 파이프를 문 그림 속 청년은 다름 아닌 시인 이상(1910~1937)이다. 구본웅은 어두운 색채와 거친 붓질로 친구의 마음에 깃든 광기와 절망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한국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뿐 아니라, 20세기 초반의 생활사와 문화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도 흥미로울 전시다. 덕수궁미술관이 자리잡은 석조전은 1909년에 고종(1852~1919)의 집무실로 건축됐다. 고종이 승하한 곳도 덕수궁이다. 미술관을 거닐면서 옛 그림도 보고, 역사의 울림도 음미해볼 만하다. 전시는 내년 3월 22일까지. 무료. (02)757-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