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진실이 허구보다 더 영화같다"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 79세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Eastwood) 감독과 전화선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전화 속 노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활기 넘치는 20대 청년의 그것처럼 귀청을 때렸다.

22일 개봉할 영화 '체인질링(Changeling·바뀐 아이)'의 감독인 그는 "3년 전 97세에 영면하신 어머니의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아 아직까지 펄펄 난다"고 말했다. 목젖을 타고 터지는 그의 강인한 울림이 전화선을 따라 발가락 끝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작품 역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분투하는 여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과거 감독님 작품은 좀 더 남성중심주의였는데, 목소리를 바꾸신 건가요?

"페미니스트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난 일부러 어떤 노선을 택하진 않습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고난을 겪고 그를 이겨내는 스토리에 뛰어듭니다. 나의 여성적인 모델은 저희 어머니입니다. 공황기에 태어난 저와 누이를 강인하게 키우셨던 인자한 어머니였죠."

―왜 '체인질링'의 배경이 된 사건에 관심을 두셨나요?

"때로는 진실이 허구보다 더 잔혹하고 드라마틱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찾으려 하는 순간마다 주인공은 장애와 시련을 겪습니다. 경찰이 노력을 기울였으면 이렇게 처참한 결말까지 오진 않았을 것입니다. 부패하고 나태한 경찰의 비열한 태도, 그것만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과거 정치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공권력이 시민들 위에 섰던 것 말이죠. 미국도 여전히 이런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요즘엔 정보화 사회라 이런 일이 일어나기 어렵겠지만, 없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은폐되고 조작되는 일들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에선 모성애가 듬뿍 묻어났지만, 졸리에겐 섹시한 여전사 이미지가 강한데요.

"외모가 너무 뛰어나면 여배우로서의 능력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난 배우로서 앤젤리나 졸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가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언급했던 "카메라 뒤에 있겠다(stay behind the camera·연기보다 감독에 매진하겠다)"는 이야기는 상당수 기자들이 꼽은 명언이었다. 그렇다고 연기에서 손 뗀 것도 아니다. 그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외골수 노인을 맡은 '그랜 토리노'(2월 26일 개봉 예정)로 관객을 다시 찾는다. 이번 주말 미국에선 개봉 4주 만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랜 토리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거론될 만큼 화제입니다. 이 영화가 연기자로서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란 외신도 나왔습니다.

"'카메라 뒤에 있겠다'는 얘기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때부터 해왔습니다. 사실 어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제 나이에 맞는 작품을 써 준다면 또 출연할 용의도 있습니다."

―한국에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작품을 고대하는 팬이 많습니다.

"아쉽지만 현재 계획으론 없습니다. 모건 프리먼, 맷 데이먼 주연으로 넬슨 만델라 이야기를 담은 차기작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그 작품이 끝난 뒤엔 고려해 볼 수도 있죠. 감독으로선 아주 좋은데, 제 멜로 상대로 적당한 배우가 누가 있을까요? 있다면야…."

▶'체인질링'은 유괴된 아들을 찾아나선 1920년대 미국의 한 어머니의 실화다. 부패한 경찰은 사건을 대충 무마하려고 엉뚱한 아이를 데려오고,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울부짖는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어머니 크리스틴 콜린스 역을 앤젤리나 졸리가 맡아 연기했다. 졸리의 호연과 이스트우드 감독이 작곡한 음악이 어울려 묵직한 감동을 준다. 2008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와 2009 골든글로브 2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