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영화팀의 금주의 선택] 스크린에 술냄새가 진동하네

백수로 지내는 혁진(송삼동)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친구들과 술을 마신다. 친구들은 강원도 정선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다음 날 친구들은 나타나지 않고 혁진 혼자 정선에 간다. 혁진은 그곳에서 대뜸 "술 한잔 사달라"는 여자를 만난다.

1000만원으로 첫 영화를 찍은 노영석(33) 감독의 작품 '낮술(5일 개봉)'은 맨정신으로 술자리에 끝까지 남은 이의 관찰기다. 감독이 섭렵해온 술판의 언어와 표정과 행동이 그대로 담겼다. 스크린에선 잇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술 냄새와 눈두덩에 올라앉은 숙취가 물씬하다. 질펀한 화면 앞에서 술꾼 관객들은 킬킬 큭큭거릴 것이다. 자신들의 어제가 그랬고 오늘 밤이 그럴 것이므로.

감독의 말처럼 "남자와 여자, 술에 관한 이야기는 전 세계에서 통한다". 게다가 시간도 뛰어넘는다. 거대한 방주(方舟)로 세상을 구했던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다가 그 아들들 덕에 부끄러움을 덜었다. 이 영화는 노아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하체를 덮었던 이불을 걷어내 버린다. 취한 이의 낭패는 보는 이에게 묘한 쾌감을 준다.

혁진은 여자친구와 헤어진 다음날, 강원도에서 만난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외딴 산길에서 여자를 위해 위스키도 사온다. 결국 노래방에서 그녀에게 키스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까지는 홍상수 감독이 집요하게 그려온 남자들과 비슷하다. 그런데 노영석의 남자 주인공은 그 다음 날 참담한 처지가 된다. 궁상맞고 추레하다.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이때쯤 대부분의 건전한 관객들은 답답하다. 그러나 술꾼들은 헛기침을 할 것이다. 이미 인생에서 몇 장면들을 지워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비현실적 이야기가 리얼리티를 갖는 이유다.

감독은 "조명 예산을 줄이려 13일간 낮에만 찍었다"고 했다. 영화가 간결하고 명확한 제목을 갖게 된 배경이다. 12번의 밤엔 감독과 배우, 스태프가 어울려 술판을 벌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애당초 잘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 별점

디지털로 만드는 새로운 감독의 웃음. 통속적인 것 끝에서 우리를 무장해제시킨다. ★★★☆

이상용·영화평론가

참 달고 맛있는 술상. 당신의 재치에 건배를! ★★★★

황희연·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