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LG배 세계기왕전] 자비심·적개심

〈제12보〉(160~173)=바둑은 다른 분야와 달리 '적(敵)'과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이번 제주 원정길에 이세돌과 박영훈은 다른 국내 동료 포함 총 4명이 동행했다. 둘은 목숨이라도 걸린 듯 사생결단의 기세로 이 바둑을 두었고, 도중 일시 휴전 속에 마주 보고 앉아 점심을 먹었으며, 승패가 갈린 뒤엔 한 비행기에 단둘이 나란히 앉아 상경했다. 바둑 세계에서나 가능한 이런 풍경은 언제 보아도 경이롭고 신기할 뿐이다.

흑은 163으로 석점 머리를 두들기며 "빨리 좌상귀 패를 해소하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백은 약점을 보강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입장이 못 된다. 164로 버텼다. 그렇다면 흑은 좌상귀 패를 때려야만 옳은데 165, 167로 딴청이다. 혹시 아끼는 후배에 대한 배려? 천만의 말씀이다. 승부사들에게 '자비'란 없다. 이렇게 두어오니 백은 더욱 고통스럽다.

170에 171로 받아 또 패가 났다. 170으로 참고도처럼 두면 패를 피할 수는 있지만 너무 쓰라리다. 이제는 좌상귀와 양패(兩覇)의 모습. 이제야말로 흑은 '가'로 따낼 법한데 173으로 팻감까지 써왔다. 여전히 서슬 퍼런 적개심이다. 견디다 못한 박영훈이 여기서 마침내 돌을 거두었다. 고난의 길을 멈추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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