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LG배 세계기왕전] 새벽 택시

〈제8보〉(88~97)=이세돌은 과거에도 지방대국을 앞두고 당일 새벽 택시로 출발한 전례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의 배경엔 이세돌의 체력에 대한 자신감도 깔려 있다. 그의 친형인 이상훈 七단은 평소 "우리 집안은 대대로 깡마른 체구지만 알아주는 강골"이라고 자랑하곤 한다. 그러나 현지 적응과 충분한 휴식이야말로 모든 싸움의 기본이다. 미리 도착해 몸과 마음을 추스른 쪽과 당일 새벽 황급히 달려온 쪽의 임전 조건이 같을 수는 없는 일.

88은 이번 결승 시리즈의 운명을 가른 한 수였다. 이세돌 본인이 패착으로 규정했다. 그는 왼쪽 흑 말에 대한 공격수단을 골똘히 생각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단이 보이지 않자(참고도는 백의 실패) 절대 선수(?)인 88로 일단 손을 돌린 것. 순간 구리가 눈을 빛내더니 89를 선수한 뒤 91로 우지끈 끊어버린다.

이제는 오히려 백 △ 두 점이 삭풍 앞의 나뭇잎 꼴이 돼버렸다. 집중력 일탈로 인한 순식간의 참극이었다. 새벽 택시가 유죄였을까. 88의 체면 때문에 92로 빠지자 93. 두텁기도 하려니와 그 자체로 짭짤한 수확이다. 그렇다면 좌상 흑이라도 잡았어야 얘기가 되는데 그게 확실치 않고, 잡았다 쳐도 집으로 백이 부족한 형세다. 97로 좌변이 아수라장인 채 오전 대국이 끝났다. 임시 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