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그녀는 '과거'에 눈감고 소년은 사랑에 눈떴다

케이트 윈즐릿(Winslet·34)이 6년 전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더 리더'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임신 중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태동을 느끼며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지. 누가 과연 그 주인공을 맡을까'라며 뱃속 아이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몇 년 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그녀에게 주인공 한나 역을 제안해 왔을 때 그녀는 아쉽게도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호흡을 맞춘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촬영과 겹쳐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나 역은 니콜 키드먼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진짜 인연은 따로 있는 법이다. 한창 촬영을 하던 키드먼이 갑작스레 임신을 하는 바람에 촬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한나 역은 다시 케이트 윈즐릿에게 돌아갔다. 임신 중 열망했던 그 역할을, 다른 배우가 임신하는 바람에 결국 맡게 된 것이다. 꿈꾼 지 6년 만에 얻은 자리, 혼신을 쏟은 연기 덕에 골든글로브 여우 조연상과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거머쥘 수 있게 됐다.

26일 개봉하는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주인공 케이트 윈즐릿의 연기력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극 중 '리더(reader)'는 그녀가 아니었지만 영화 속에 그녀는 온전히 '리더(leader)'였다. 역할로서도 실제로도 15세 차이인 독일 출신 배우 데이비드 크로스(Kross·19)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도 그녀였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때는 1950년대 독일. 15세 소년 마이클 베르크(데이비드 크로스)는 길을 가다 심한 구토를 일으키고 중년의 여인 한나 슈미츠(케이트 윈즐릿)에게 도움을 받는다. 한나의 원숙미에 빠진 마이클은 매일 그녀의 집에 찾아가게 되고, 한나는 사랑의 대가로 그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말한다. 8년 뒤 다시 만나게 된 둘. 법대에 다니던 마이클은 법정에서 나치 전범 재판을 받고 있는 한나를 발견하게 된다. 한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던 것. 마이클은 한나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눈치 채게 되지만 한나는 끝까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법학자가 된 마이클(랄프 파인즈)은 종신형을 받은 한나를 위해 책 내용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보낸다.

문맹인 한나는 유대인 대학살에 눈감아 버린 일부 독일과 유럽 시민들을 상징하고 있다. 문맹이었던 한나가 글을 깨쳐 가면서, 그녀는 자신이 저질렀던 무서운 과거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되고 스스로와의 투쟁을 벌인다. 한나는 죄의식과 약점, 수치와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외로운 여인이다.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포기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 질문을 내던지기 때문에 각자 생각하는 답은 다를 수 있다.

모호함으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마이클과 한나의 사랑이다. 독일 내 전후 세대 간의 간극과 만남을 상징하고 있는 둘은 육체적·정신적 사랑과 교감을 통해 화해와 이해, 용서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