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이세돌, 아직 못이룬 '천하통일'

프로 바둑세계는 춘추전국시대의 땅 싸움을 빼다 박았다. 기사들에게 타이틀 획득 경쟁은 곧 지배 영토 다툼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혈투 속에 타이틀 주인이 바뀌면 천하의 지형(地形)도 즉각 변한다. 기전 규모의 크기나 국내·국제전의 구별에 앞서 '최다관왕'은 그 시점 최고의 제후(諸侯)를 상징한다.

이창호(34)가 지배하는 '창(昌)나라'와 이세돌(26)이 이끄는 '돌(乭)나라'. 이 둘은 몇 년 전부터 바둑계를 이끌고 있는 양대 강국이다. 2000여년 전 중원을 다투던 항우와 유방의 초한(楚漢) 대결을 연상시킬 만큼 처절하다. 치고받는 둘 간의 영토 싸움도 10년째로 접어들었다.

이세돌이 2000년 12월 제5기 천원성 함락(상대 류재형)에 성공, 처음 제후 대열에 합류할 당시 이창호는 4관왕이었다. 이창호의 영토는 그 뒤로 계속 뻗어나가 2003년 3월엔 춘란배 접수로 10관왕까지 올랐다. 반면 이세돌은 5관왕을 최고점으로 내리막에 접어들더니 2004년 8월 후지쓰배 우승 벨트를 풀고 저잣거리로 쫓겨났다. 무관(無冠)으로 전락한 것.

그로부터 약 1년 사이 상황은 또 한 번 일변한다. 이창호가 몇 개의 실지(失地)를 겪는 사이 이세돌은 삼성배 등 3개의 국제대회를 차근차근 편입하는 데 성공, 2005년 7월 양웅의 지배 타이틀이 처음으로 동수(각 4개)를 이뤘다. 이 무렵엔 이들 외에 박영훈과 최철한도 각각 4개의 성을 거느림으로써 국내 바둑 사상 가장 치열한 춘추전국시대를 연출했었다.

쫓기던 이창호는 2006년 GS칼텍스배를 획득한 이세돌에게 두 번째 타이(5대5)를 허용했다. 그리고 2007년 2월에 접어들어 이세돌은 마침내 생애 처음 '최고 제후'로 올라선다. 그가 맥심배를 장악한 반면 이창호가 십단성에서 퇴각하면서 5대4 역전. 둘 간의 격차는 이후 계속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세돌은 2008년 LG배 정상에 깃발을 꽂으며 8관왕에 등극, 전성기를 누렸다. 왕위와 중환배 등 2~3개에 의지한 이창호가 이세돌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는 법. 이창호는 이후 꾸준히 4~5관왕을 유지한 반면, 이세돌은 올 들어 천원전 LG배 바둑왕전서 거푸 준우승에 그치며 영토가 오그라들었다.

그 결과 둘의 타이틀 지분이 또다시 4대4로 사상 세 번째 타이를 이룬 것이 현재 상황이다. 3월 16일 벌어진 'KBS 대첩'(27기 바둑왕전 결승) 맞대결서 이창호가 승리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 현재 이창호는 전자랜드배 왕위 바둑왕 중환배, 이세돌은 국수 명인 삼성화재배 TV아시아선수권을 지배하고 있다. 박영훈(GS칼텍스배·기성) 강동윤(천원) 박정환(십단) 홍성지(물가정보배) 최철한(맥심배) 등이 '군소 제후군(群)'.

앞으로 '창나라'와 '돌나라'의 영토는 어떻게 변화할까. 젊은 이세돌 쪽이 유리해 보이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최근 이세돌의 3연속 결승전 실패는 뭔가 '돌나라' 쪽의 이상 징조라는 것. 8살 아래 후배를 따라잡은 선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창호의 기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제3그룹' 청년 맹장들이 '양이(兩李)'의 철옹성을 줄기차게 두드리고 있어 앞으로의 지형도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국내 최다관왕 기록은 이창호(1994년 13관왕)가 보유 중이지만 전관(全冠) 석권은 아니었다. 천하통일에 해당하는 전관왕은 조훈현이 1980년과 82년, 86년 등 혼자 세 차례 달성했다. 타이틀 보유 수 단독 1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기사도 조훈현으로 무려 16년(1975~90년) 동안 철권 통치를 펼쳤다. 이창호는 1992년부터 2003년까지 12년 연속 최대 영토를 지배했고 이때가 명실공한 그의 전성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