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 사활문제는 그녀에게 묻는다

2008년 12월 바둑리그 종료 직후 우승팀 영남일보의 축하파티가 열렸다. 최규병 감독과 리그 홍일 점기사 조혜연(24) 간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우승에 별로 기여 못해 죄송합니다." "대신 너는 여성기전 우승 트로피 하나 따오는 걸로 하자." 이를 악문 그녀는 한 달 뒤 여류명인 결승에 올랐지만 루이 九단에게 1대2 역전패한다. 약속을 지킬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

"다른 어떤 패배 때보다도 슬펐다. 보란 듯 우승컵 들고 감독님을 찾아가 칭찬 듣고 싶었는데…." 그날 밤부터 조 八단은 사활(死活)문제를 만들기 시작한다. 최 九단이 묘수풀이 책 구입하러 일본에 종종 들를 만큼 그쪽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 그리고 꼬박 20일을 매달려 사활창작집 한 권을 뚝딱 만들어냈다. 최근 오로미디어(주)가 펴낸 'Hye Yeon's CREATIVE LIFE & DEATH' 뒤에 숨은 비화다.

중견기사 김수장 九단은 "조혜연의 재주와 개성이 고스란히 녹아 든 훌륭한 작품들이다.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극찬했다. 김 九단은 창작 사활집을 책으로 펴낸 국내 프로 1호다. 그 뒤를 권오민 四단이 계승했고 다시 조혜연이 잇게 됐다. 최규병 九단은 "사활문제 창작은 예술적 재능이 필수인데 단시간에 묘미 넘친 작품들을 완성했다는 게 놀랍다"고 했다.

조혜연을 잘 아는 사람들은 사활집 출간 자체가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사활 공부에 매달려 본 시기가 입단 직전의 몇 개월뿐이었기 때문. 프로 지망생의 경우 초보 때부터 사활책 표지가 닳아 해질 때까지 반복 학습시키는 세태에 비춰보면 상상도 못할 얘기다. 그래서인지 문제들이 대부분 추상적 형태를 띠고 있다. '만들고 싶은 모양을 상상한 뒤 수읽기를 반복해' 문제를 완성한다. 예컨대 자신의 성인 '조'를 가지고도 작품을 만드는 식이다.

책의 제목과 내용 대부분이 영어인 것은 외국인용으로 만들었기 때문. 그녀는 언제나 외국 팬들에게 직접 다가가 바둑을 전파하려는 생각으로 꽉 차있다. 2006년 고려대 영문학과 입학 직후 영문 블로그 'Full of surprises'를 만든 것도 그런 취지였다. 세계 50여 개국 팬들에게 인기 폭발 중인 이 블로그는 요즘엔 사활문제에 대한 '질문 창구'로도 이용되고 있다.

대국과 학교생활, 블로그에 묻혀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판이란 조혜연은 "방학을 기다렸다가 출제를 계속, 총 10권을 채우고 싶다"고 했다. 묘수풀이 창작은 바둑문화의 또 다른 경쟁 터로 불린다. 일본 기사들이 판을 쳐 온 '사활의 세계'에 강력한 한국인 스타가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