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고독 앞에 몸부림치는 나신(裸身)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전시장에서 만난 서양화가 오치균(54)은 은회색 캘빈 클라인 재킷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계속해서 헬스클럽에서 몸을 다지고 있는 그에게 도회적인 패션은 잘 어울렸다. 오치균은 지난 몇 년간 컬렉터들이 관심을 가진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블루칩 작가'로 꼽혀왔다.

인기작가 오치균은 미국 뉴욕이나 샌타페이, 서울, 사북의 풍경을 그려온 풍경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이번 전시 《소외된 인간》은 자신의 누드를 화폭에 담은 '인체 연구'를 보여주고 있다.

오치균의 인체 연구는 어두운 화면에서 절규하며 몸부림치는 남성 누드화가 주를 이룬다.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절망감을 보여주고 있는 이 남성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꼽는 미국 유학 시기(1986~1989)에 주로 그린 자화상들이다. 몇 년 전 서울대 정영목 교수가 작가의 작품들을 보고 전시를 권하면서 전시회가 이뤄지게 됐다.

오치균은 작품 앞에 서자 "너무 어려웠던 시기에 그렸던 그림이라… 솔직히 보고 싶지도 않다"며 등을 돌렸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오치균은 어렵게 돈을 모아 1986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꿈에 부풀어 미국 땅을 밟은 그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뒤따라오기로 했던 아내가 잘 알고 지내던 사람한테 모은 돈을 다 날려버렸어요." 빈털터리가 된 오치균은 뉴욕 브루클린 흑인 빈민가에 집을 빌려 들어갔다. 친구도, 돈도, 나갈 곳도 없던 그는 침대와 TV만 있는 방 안에서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혼자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주워온 침대 위에서 거울을 보며 자신의 분노와 절대 고독을 응시해야 했다.

이번 전시 작품은 그때 그렸던 작품들로 대부분 처음 공개된다. 형광색으로 표현된 TV는 처절한 작가의 나신(裸身)과 침대를 무심하게 비추고 있다. TV는 어둠 속에서 홀로 발광(發光)하며 작가의 소외를 부각시킨다.

작가는 세탁소에서 셔츠를 다림질하며 돈을 벌었고, 스트레스와 극도의 피로로 생니가 빠져나가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치균은 "창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자신의 비참함을 그리면서 조금씩 위안을 얻어갔다.

이 과정에서 그림을 그리던 붓을 손가락이 대신하게 된다. 손가락으로 직접 물감을 캔버스에 바르게 된 것이다. 그는 "몸으로 부딪쳐보자는 생각에서 답답한 붓 대신 손을 쓰게 됐다"고 했다. 오치균의 두터운 마티에르가 묻어나는 손끝의 터치는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갈구한 덕분인지 귀국 후 가진 전시회의 반응이 좋았고 오치균은 작가로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귀국 후에도 몇 년간 아내와 화실 바닥에서 자야 할 정도의 빈곤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오치균은 이제 인정받는 작가가 되었지만 아직도 배신과 아픔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오치균이 보여준 슬프면서도 차분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뉴욕 시절의 '인체 연구'가 스스로를 담금질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호된 시절을 겪어서일까. 오치균은 오전 5시면 일어나 운동하는 1시간을 빼면 온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혀 본업에 충직한 작가가 됐다. 전시는 16일부터 5월 10일까지. (02)2287-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