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엔 널린 태권도장 일(日)엔 왜 안 보일까"

완전히 탈색한 뒤 물들인 희뿌연 금발에 새까만 눈썹이라니. 호텔 식당에 나타난 기타무라 류헤이(40) 감독은 탈선한 고등학생 같은 느낌이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그가 한 첫 얘기는 "다소 쌀쌀하니 히터를 좀 켤까요?" 굳이 드러내려 하진 않았지만, 그 한마디로 햇살 따뜻한 미 캘리포니아에서 영화 작업을 하다 온 티가 났다.

올 하반기 촬영에 들어가는 영화 '태권'(가제)의 사전 작업을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가 제작할 '태권'은 오사카에 사는 불량한 고교생이 태권도를 알게 되면서 '지옥 훈련'을 해내고, 진정한 '사내'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일본 배우지만 한국 배우들도 캐스팅할 예정이다. 이번 영화 '태권'은 이미 일본 굴지의 코미디·연예 매니지먼트사인 요시모토 흥업과 제작 협력을 마쳤고, 북미 유럽 등 해외 배급은 미국 아크라이트 필름사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방한 기간에 그는 한국 배우들과 만났고, 촬영에 적당한 지역도 물색했다.

머리 색은 서양인인데, 일본말을 하고, 한국의 '태권도'를 영화로 만들 작정인 이 감독. 이 교묘한 엇박자는 그가 살아온 배경을 듣고 나니 퍼즐 조각을 다 맞춘 듯 정확히 맞물린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호주로 날아가 영화를 배웠고, 현재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가라테 검도 유도 등 안 해본 운동이 없다고 했다.

액션에 대한 그의 열망은 일본 인기 만화를 영화화한 '소녀 검객 아즈미 대혈전'(2003)에 잘 나타나 있다. 소녀 검객은 감수성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대신 살인기계처럼 적을 베는 데 열심이고, 주변 캐릭터들의 진지함 때문에 오히려 웃음이 난다. 액션 영화 마니아, 만화 애독자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일반 관객에게는 "뭔가 B급(싸구려) 냄새가 난다"는 의심을 받았고, 결국 국내에서는 처참한 흥행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바로 그의 잔인함의 독특함에 높은 점수를 줬다. 호러의 거장 클라이브 바커 원작의 단편 소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MMT)'(2008)을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으로 할리우드 데뷔를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류헤이 감독은 "태권도는 일종의 미스터리"라고 했다. "미국 어느 도시를 가도 태권도 도장은 하나씩 꼭 있는, 세계적으로 이렇게 유명한 무술을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는 게 굉장히 의아했습니다. 3년 전에 일일 체험을 해봤는데, 동작의 섬세함이나 액션의 움직임이 매우 신비스러웠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오사카의 코리아타운 '쓰루하시'에 가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전 전혀 무섭지 않았죠. 재일 교포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한국인의 정신(spirit)을 느꼈습니다. 내가 찍은 영화를 봐도 꼭 한국 영화 같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한국 영화 같다'고 이야기했을까. "한국 영화엔 독특한 '엔터테인먼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영화엔 그 중요한 '엔터테인먼트'가 결여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일본에서 저 혼자 액션과 엔터테인먼트를 할 줄 아는 감독이 됐습니다." 그는 또 "'소녀 검객 아즈미 대혈전'의 포스터를 봐도 한국 것이 일본 것보다 훨씬 멋있다"며 "MMT도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했지만, 일본에선 아직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조언을 했다. "한국 감독 중에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우선 언어부터 배우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의사소통만큼 영화 촬영할 때 중요한 건 없거든요. 영어가 안 되면 스태프를 장악하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