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당당히 국립현대미술관에 내걸리다

    입력 : 2009.05.28 03:16 | 수정 : 2009.05.28 07:33

    내달 3일 한국만화 100년전(展)
    폭력·선정문화 대명사서 미술로 인정… 초대받아
    "첫 전시, 제대로 해야죠" 원로만화가들 밤샘 준비

    한국 만화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만화가들이 25일 서울 예장동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자신의 만화 캐릭터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오세영·이두호·이희재·김동화씨./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고바우 영감, 꺼벙이, 머털도사, 요정 핑크, 악동이, 아기공룡 둘리 등 한 세기 동안 어른 아이 안 가리고 전 국민을 웃긴 만화 주인공들이 다음달 3일 일제히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진출한다. 이날부터 8월 2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만화 원화 1500점과 희귀 만화책, 만화잡지 등을 망라하는 대형 전시 '만화―한국만화 100년 전'이 열리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1969년) 이후 만화 전시회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09년 6월 2일 한국화가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1884∼1933)이 그린 만평이 개화기 신문 '대한민보'에 실린 이래, 꼭 100년 만에 한국 만화가 당당하게 '작품'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지난 24일 서울 예장동 서울애니메이션센터 '한국만화 100주년 위원회' 사무국에서 만난 반백의 만화가들은 전시회 준비에 바빴다. '머털도사'의 이두호(66) 화백, '요정 핑크'의 김동화(59) 화백, '악동이'의 이희재(57) 화백, 만화판 '토지'를 그린 오세영(54) 화백 등 1980~90년대를 주름잡았던 인기 만화가들이다. 이들은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로 싱글벙글하며 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 초대장을 착착 접어 차곡차곡 쌓고, 전시회 준비 자료와 각종 원화 뭉치를 꼼꼼히 살펴봤다. 테이블 가운데 전시회 포스터도 쌓여 있었다.

    이들은 작년 9월 전시회 일정이 확정된 뒤, 올 초부터 거의 매일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모여서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들과 함께 전시 준비를 하느라 2~3일 건너 한번씩 밤을 꼬박 새웠다. 직업 특성상 평소에는 '혼자만의 작업'에 몰두하던 올빼미 만화가들이 대낮부터 '공동작업'에 몰두했다. 아이디어 내고 기획안 짜는 사이, 밤이 기울고 아침이 오면 소박한 밥집이 밀집한 남산동 골목에 몰려가서 아침밥에 반주를 곁들여 얘기를 이어갔다.

    발품을 팔며 희귀본도 모았다. 만화계 마당발인 이희재 화백이 1950년대 전국 어린이를 열광시킨 고(故) 김종래 화백의 장편 만화 '엄마 찾아 삼만리' 초판본을 어렵게 구했다.

    이승미(여·48) 국립현대미술관 교육팀장은 "1980~1990년대는 만화잡지가 전성기를 누리고, '둘리' '하니' '영심이' 같은 '국민 캐릭터'들이 잇달아 등장한 한국 만화 최대 황금기였다"며 "이 시대를 풍미한 분들이 이번 전시의 주축이 됐다"고 했다.

    김동화 화백이 질끈 묶은 장발을 쓸어 넘기며 "1970년대에는 5월이 되면 교육당국에서 어린이날 행사랍시고 만화책들 모아다가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곤 했다"며 "그랬던 만화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간다니,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좋아했다.

    이희재 화백은 "길창덕 선생님의 '꺼벙이', 김성환 선생님의 '고바우 영감' 등은 물론 강풀·강도하 등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 작품까지 모두 전시된다"며 "한마디로 만화가들이 국립현대미술관을 접수하는 셈"이라고 했다.

    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1980~1990년대에는 청소년들 사이에선 '보물섬', '새소년', '윙크' 같은 만화잡지가 큰 인기를 모았다. 만화 대본소는 장편 만화를 읽는 어린이와 청소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인기 만화가들 집에는 왕방울만한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주인공들 모습을 흉내 내서 그린 팬레터가 밀려들어 사나흘이 멀다 하고 라면박스가 꽉 찼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싸늘했다. 우선 검열이 심했다. 학부모가 애들에게 "만화 보지 말라"고 혼냈다. 세상 사람들은 만화가를 얕봤다.

    김동화 화백은 "엄마 아빠가 한 방에서 도란도란 얘기하면 '남녀가 한 방에 있다'고 삭제, (상반신 없이) 다리 네 개가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은 '위에서 뭐 하는지 모른다'고 삭제, 장미꽃에 이슬이 아롱아롱 맺히면 '화려함을 조장한다'고 삭제…. 뭐 그런 식이었다"고 했다.

    이두호 화백은 "도망치는 주인공에게 포졸들이 창 끝을 겨눴는데 '하필 왜 가랑이에 겨눴냐'는 지적을 시민단체로부터 받은 적이 있다"며 "그 장면을 포함해 몇몇 장면을 문제 삼아 검찰에 고발당하고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미대를 중퇴한 그는 "옛날엔 미술계 친구들이 '요즘 할 만하냐'고 은근히 무시하는 투였지만, 요즘은 내가 (더 유명해져서) 표정관리 한다"며 "그때 그 천덕꾸러기(만화)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통장 잔고를 채워준다"고 했다.

    전시 총감독을 맡은 시사만화가 박재동(57) 화백은 "어린 시절 만화가게를 하시던 어머니한테 동네 아주머니들이 툭하면 항의하러 왔는데, 이제 대학에 만화학과가 생기는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오세영 화백은 "만화가 비로소 '예술'로 인정받는 시대가 왔구나 싶다"고 했다.

    이번 전시회 포스터에는 꺼벙이·꺼실이 남매, 여중생 육상스타 하니, 까치머리 오혜성, 아기 공룡 둘리, 말썽꾸러기 강아지 강가딘 등이 총출동했다. "추억의 만화 캐릭터들이 더 있을 것 같은데, 많이 빠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 만화가들은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껄껄 웃었다.

    "뒤에 숨어서 장난치고 있잖아요. 안 보여요? 우리 눈엔 다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