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신(神)'의 고민 "창호냐 창하오(常昊)냐"

나는 바둑 신(神)이다. 세상 천지 바둑과 관련된 모든 승패와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이번 이세돌 파동에 특히 한국 팬들의 충격이 컸다는 것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를 원망하진 말지어다. 세상사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이니, 진득한 자세로 길게 보도록 하라. 전화위복이란 말도 못 들어 보았는가.

며칠 전 TV아시아대회도 끝났으니 나의 다음 과제는 제7회 춘란배 세계선수권대회다. 22일부터 중국 청두(成都)에서 한국 이창호(34)와 중국 창하오(常昊·33)가 결승 3번기를 펼친다는 것쯤 웬만한 팬이라면 모두 알고 있으렷다. 국적을 초월해 절친한 친구로 우정을 나눠 온 둘을 결승에 붙인 걸 보면 내 장난끼도 보통은 넘는 것 같다.

한데 이번엔 누구 손을 들어줄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다. 또 이창호에게 정상 등극을 허용해주자니 약간 눈치가 보인다. 그는 지금까지 무려 23회나 세계를 품에 안은 '우승 포식자'다. 이에 반해 창하오에겐 고작 2번의 패권을 허락했을 뿐이다. 주변의 동료 신(神)들이 내게 "너무 이창호만 편애한다"고 비난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건 최근 몇 년 간 내가 이창호에게 얼마나 시련을 안겨주었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대회가 2005년 봄 제5회 춘란배였다. 그 뒤 이창호는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6번 결승에 나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중환배 한 개를 챙기긴 했지만 군소기전이고, 그나마 올해부터 사라진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내가 이창호에게 6연속 준우승을 내린 것은 그를 좀 더 강하게 단련시키고자 하는 뜻이었다. 그런 마음 씀씀이를 보면 내가 그를 편애한다는 지적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세돌의 일시 퇴장 후 이창호가 당분간 혼자 한국의 간판 역할을 하게 됐다는 점도 염두에 안 둘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창하오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춘란배 때마다 '장난'을 쳐 온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나는 그 동안 춘란배 토너먼트에서 창하오를 중도 탈락시키는 기사에게만 우승이 돌아가도록 장치해 놓았었다. 바꿔 말하면 창하오는 매번 그 대회 우승자의 칼에 의해 어느 지점에선가 사라져야 했다. 2연속 결승에 오른 창하오에게 이제는 첫 우승을 허용해야 옳지 않을까? 어쨌거나 창하오를 꺾어야만 우승한다는 춘란배 징크스는 이번 결승 결과에 관계없이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이창호는 창하오에게 21승8패, 7할이 넘는 승률을 유지하고 있다. 초창기 한때 12연승을 달리는 등 격차가 벌어지자 "창하오는 이창호에 의해 성장점이 마비됐다"는 말까지 나왔었다. 그런데 최근 2년 간만 놓고 보면 반대의 흐름이다. 창하오가 3승1패로 앞선 것이다. 그 중엔 삼성화재배 결승전 2대0 완봉승도 포함돼 있다.

중국이 주최하는 춘란배는 격년제 행사로 우승상금 15만달러(약 1억 9000만원)의 B급 국제대회인데 전통적으로 중국의 텃세가 매서웠다. 이번 7회 대회도 8강까지 추려낸 시점에서 이창호를 제외한 나머지 7자리를 중국 기사들이 채웠을 정도다. 이창호는 천야오예(陳耀燁) 구리(古力) 쿵제(孔杰) 등 죽(竹)의 장막을 혼자서 헤치고 결승 문턱에 도달했다.

중국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국에 눌려 지내다가 5관왕 구리를 앞세워 눈 깜짝할 새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이세돌이 빠진 한국으로선 큰일 난 듯싶겠지만 앞날은 모르는 것이다. 이래저래 이번만큼 중요한 결승전도 없는데 누구 손을 들어줘야 하나. 바둑 신 생활 5000년 만에 이런 고민은 또 처음이다. 신계(神界) 여론조사라도 한 번 실시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