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하오와 또 격돌… 실수를 막아주소서"

존경하는 바둑 신(神)께. 지난 주 제7회 춘란배 결승전에 앞서 조간신문에 실렸던 임의 말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임께서 그간 다른 어떤 기사보다도 저를 사랑해 주셨다는 말씀에 공감하며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저 아닌 중국 창하오(常昊·33)에게 지난 주 춘란배 우승컵이 돌아간 것도 임의 깊으신 뜻에 따른 결과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와 창하오는 절친한 친구입니다. 나이도 한 살 차이인데다 이름까지 비슷하고 무엇보다 마음이 통합니다. 중국에 머물렀던 이번 결승전 때도 그와 8세 연상 아내 장쉔(張璇) 八단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창하오가 춘란배를 품에 안고 세 번째 세계 정상에 오르던 순간 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하의 말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우정은 우정, 승부는 승부입니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제가 12연승을 올리면서도 우리는 피차 미안함도, 비굴함도 없이 서로 당당했었지요. 거꾸로 제가 2승6패로 뒤진 2006년 이후에도 똑같습니다. 통산 31국을 두어 제가 21승을 거두었다는 과거 기록은 앞으로 둘 간의 대국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을 겁니다.

오는 7월 4일과 6일 도쿄에서 제22회 후지쓰배 준결승 및 결승전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 준결승 상대가 또 다시 창하오더군요. 스스로 "장난끼가 넘친다"던 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미소 지었습니다. 후지쓰배는 최고(最古)의 세계대회인데다 재작년까지 10연패(連覇)를 할 만큼 한국바둑의 보루였죠. 저와 함께 4강에 올라 준결승 맞대결을 갖게 된 박영훈(24) 강동윤(20) 두 후배의 건투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번 후지쓰배를 앞둔 제 남다른 심정을 신(神)께서는 짐작하십니까. 2005년 춘란배 제패 이후 4년 여 동안 제가 따낸 타이틀은 곧 사라질 군소기전(중환배) 1개뿐입니다. 나머지 7개 국제기전 결승서 전패했지요. 23개나 되는 세계 타이틀을 허락해 주셨던 님의 뜻을 완전히 접기엔 34세란 제 나이가 너무 젊다는 생각에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끼는 후배 이세돌군이 특별한 사정으로 얼마 전부터 휴직에 들어갔지요. 살펴보니 올 해 들어 세돌이가 LG배와 TV아시아선수권서, 조한승이 비씨카드배에서, 제가 춘란배에서 중국기사와 결승을 펼쳐 줄줄이 패했습니다. '한국 바둑의 위기'란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더군요. 그 전성기를 이끌었던 저로선 착잡함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까짓 우승상금 1500만 엔(약 2억 원)이 문제겠습니까.

창하오가 이번 춘란배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이창호의 실수가 잦아졌다. 그것이 과거 이창호에겐 없던 역전패가 자주 나오는 이유"라고 했다죠. 신(神)께 맹목적으로 승리를 기구(祈求)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 저는 무릎 꿇고 이렇게 아뢰고자 합니다. "맑은 정신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돌을 쓸어 담을 때 후회로 가슴 치지 않는 바둑을 두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제가 아니어도 좋으니 한국 바둑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굽어 살피소서." 대한민국 프로기사 이창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