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식의 시네마 오디세이] 아빠는 힘이 세다..김윤석vs송강호

영화 '거북이 달린다'는 익숙하다. 그 익숙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편안함과 진부함이다. 허리띠 풀고 즐길 수 있다. 반대로 새롭지 않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하다.

진부함이 먼저 눈에 띈다. 영화는 범죄, 액션, 드라마가 뒤섞인 장르다. 주인공 형사는 무능하고 부패하다. 고참은 닳고 닳아서 능글맞고, 신참은 순진하다.('투캅스'). 그래도 뚝심으로 홀로 범인을 체포하고('공공의 적'), 시골형사와 서울형사는 여전히 티격태격한다('살인의 추억'). 탈주범과 숨겨진 애인(다방 레지), 좌충우돌하는 조연들도 단골메뉴다. 결말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추격자'와 겹친다. 배우 김윤석의 이미지 탓이다. 그는 두 작품 연속 형사로 출연한다. 비슷한 점이 또 있다. '거북이 달린다'에서는 피의자 심문하다 정직을 당했고, '추격자'에서는 전직 형사가 됐다. 그래도 자존심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럽게 강하다.

영화는 솔직하다. 이런 진부함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뻔뻔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그 뻔뻔함이 오히려 이야기를 밀고나가는 힘이 된다. 엉뚱하게 옆길로 새지 않는다. 뒷심이 꽤 좋은데, 그건 온전히 캐릭터의 힘이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배 나온 중년 시골형사의 '사생활'이다. 밖에서는 형사라고 힘깨나 쓰지만, 집에서는 영 맥을 못 춘다. 아내에게 지갑을 뺏기고, "밥도 안 준다"고 투덜거리다 잠든다. 아내 통장에 손을 대고, 초등학생 딸에게 "대체 뭐 하고 다니는겨"라고 핀잔을 듣는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살림은 궁핍해서, 아내는 만화방으로도 모자라 양말 아르바이트까지 한다. 이런 캐릭터의 형사는 거의 없었다.

여기에 김윤석의 연기가 더해진다. 그는 '지금 예산경찰서에 가면 그런 형사가 꼭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실감나게 '조필성'을 보여준다. '미지근한 물'과 같이 편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는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연기력과 캐릭터가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영화의 단점들을 메워준다.

'조필성' 같은 인물을 본 적이 있다. '우아한 세계'(2007)의 강인구(송강호)다. 생활 느와르를 표방한 이 영화에서 강인구는 조폭이었다. 하지만 폼생폼사하는 기개는, '대부'의 존 코르네오레(말론 브란도)와 같은 카리스마는 눈 씻고 봐도 없다.

강인구는 조폭 2인자다. 집에서는 '쥐' 신세다. 아내는 쇳소리로 이혼을 요구하고, 중학생 딸은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소리친다. 반대로 그는 큰소리 한번 못 친다. 돈도 못 벌고, 선생님께 촌지로 룸살롱 티켓을 줬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김없이 '출근'한다. "배운 게 이거밖에 없어서"다. 아들 유학비도 벌어야 하고, 수돗물 잘 나오는 집도 마련해야 한다.

'형사' 조필성도, '조폭' 강인구도 한심하다. 조필성은 범인에게 무참하게 얻어터진 후 "너, 형사 맞아?"라는 말을 듣는다. 강인구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각목 몇 번 휘두르고는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간다. 프로의 굴욕이다. 그러나 그건 겉모습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자부심이 있다. 남편의, 아빠의 책임감이 있다.

조필성은 범인을 잡은 후, 아내에게 전화한다. "당신 빤스 샀어." 이 멘트는 사연이 있다. 어느 날 그는 통나무처럼 누워있는 아내를 집적거리다가, 구멍난 팬티를 보고 씁쓸하게 돌아선 적이 있다. 이제 그 자괴감을 당당하게 만회한다. 또한 딸이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야!"라고 말하며 으쓱거리게 만든다. 살맛이 난다. 기러기 아빠 강인구는 혼자 라면을 먹으면서, 유학 간 아내와 딸이 정원에서 노는 비디오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 장면들이, 진부한 듯하면서도, 짠한 여운을 남긴다. 우리 시대 가장들의 힘겨운 초상 이다. 거북은 달릴 수 없다. 그래도 거북은 달린다. 그래서다. 아빠는 힘이 세다.

< 영화평론가ㆍ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