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LG배 세계기왕전] 엎지른 물

〈제13보〉(178~193)=한 판 바둑의 부침(浮沈)을 지켜보노라면 승패란 참 덧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곤 한다. 특히 이 바둑처럼 숱한 실착으로 역전을 주고받을 경우엔 승자의 월계관이 꼭 가치 있는 것인지, 패배를 열성(劣性)의 지표라며 아쉬워해야만 하는지 헷갈린다. 오죽하면 당대의 최고 스타들조차 "바둑은 슬픈 드라마"(사카다), "지내놓고 보면 모두가 운명"(조치훈)이라 설파했겠는가.

흑 ▲ 때 178이 과욕이 빚은 문제수. 참고1도 1로 백 2점을 줘 버리고 7까지 상변을 건설한 뒤 A와 실전보 '가'를 맞보았으면 백의 낙승이었다(수순 중 5가 중앙 연단수를 완화시키는 호수). 179의 승부수 때 기어이 182란 패착이 터졌다. 참고2도 1로 물러서고 3까지 바꿔쳐도 백은 손해가 없었다.

185에 붙여 마침내 백진에서 수가 나는 모습. 참고3도 1로 차단하면 4까지 백 4점이 위태로워진다. 창하오가 뒤늦게 수읽기에 골몰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188의 굴욕을 거쳐 193의 1차 도강(渡江)을 허용했다. 자, 백은 '나'에 두어 2차 도강을 막을 수 있을까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