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영화, 새롭다기보다 기괴해"

배창호(56) 감독은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다. 26년 전 개봉됐던 자신의 영화가 그때쯤 태어났을 관객들 앞에서 다시 상영되기 직전이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한창인 19일 오후 2시, '적도의 꽃(1983)'이 상영될 부천의 멀티플렉스 '프리머스소풍' 6관은 98석이 모두 동났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 회고전' 8편 중 하나였다. 영화가 끝난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는 1시간30분이나 계속됐다. 배창호 감독과 마주앉은 건 그다음이었다.

―'적도의 꽃'은 서른 살 때 연출한 세번째 작품이지요.

"'꼬방동네 사람들'과 '철인들'에 이어진 영화입니다. 그때 한국에 영화사가 20개쯤 있었는데, 모든 영화사들이 저에게 연출 제의를 했습니다. 젊은 감독 중 가장 주목받았었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영화였을 것 같습니다.

"스토리가 단순하지 않고 주인공 캐릭터가 매우 복잡했기 때문이죠. 개봉 후 별로 관객이 들지 않기에 '역시 이런 영화는 안되나' 했는데,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입소문을 타면서 관객이 늘어나, 결국 그해 흥행 1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적도의 꽃' 스코어는 17만명이었다. 2000석 남짓한 극장(단성사) 한 곳에서의 기록이며 재개봉과 지방 관객 숫자가 빠졌음을 감안할 때 이는 꽤 좋은 성적이다. 배창호 감독은 이후 '고래사냥(1984)'과 '깊고 푸른 밤(1985)', '기쁜 우리 젊은날(1987)'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별명까지 얻었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작품이 뜸해지더니 '길(2006)' 개봉 뒤로는 새 영화 소식이 없는데, 투자자가 없어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매년 한두 편씩 연출 의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시나리오나 연출에 대해 타협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나와 맞는 투자자를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독립영화 방식으로 '러브스토리(1996)' '정(2000)', '길'을 찍었습니다."

이를테면 '북경반점(1999)' 연출 제의가 왔을 때, 그는 시나리오를 자신의 방식대로 고쳤다고 한다. 이것을 투자사에서 마땅치 않게 여겼고 결국 그는 '타협하지 않고' 연출을 포기했다. 2004년 건국대 영화과 창립교수로 학계에 입문한 그는 4년 만인 2007년 퇴직했다. "입으로 가르치지 말고 몸으로 가르쳐야겠기에, 둥지를 떠나 다시 광야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100% 창작의 자유가 보장된" 작품을 하나 찍고 있다고 했다. 제작비 1억8000만원의 저예산영화 '여행'으로,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 인물들 이야기를 그린 3편짜리 옴니버스 영화다. 지난 6월 촬영을 시작했다.

―한국영화는 자주 보십니까.

"화제작은 다 봅니다. 요즘 한국영화엔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온갖 기괴한 것들이 등장합니다. 해외영화제 입맛에 맞거나 평론가들이 쓰기 좋은 쪽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영화의 영향력에 대한 자각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으면 해요. 요즘은 날것 그대로 표현해야만 흥행이 됩니다. 영화는 필터예요. 감독의 감성과 자각으로 잘 걸러내야 합니다. 영화가 감독의 대리만족이나 삶의 수단이 돼서는 안됩니다."

―'흑수선(2001)'을 제외하면, 언젠가부터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다룬 영화만 찍는 듯합니다.

"한국적인 원형질을 내 안에서 발견한 것이죠. 제가 그렇게 익어온 것이라고 봐요. 일상성에 대한 가치라고 할까, 그런 것을 찍을 때 즐겁습니다. 불필요한 드라마의 남발, 왜곡된 인간형에 대한 묘사가 90년대 초부터 싫어졌습니다. 저의 뜻에 동의하는 투자사가 '스타 배우를 쓰자'고 하면 '스타를 쓰면 영화가 변질된다'고 거절했습니다.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에 스타를 썼다면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을까요."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을 필두로, 자신의 영화에 직접 출연하면서 구설도 많았습니다만.

"비아냥도 있었고 구설에도 많이 올랐지요. 특히 내 주변사람들이 그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아내(김유미)와 함께 '러브스토리'에 출연했을 때 말이 무척 많았죠. 그렇지만 내 영화 중 '러브스토리'에 마니아가 제일 많아요."

―17개 작품 중 특히 의미를 두는 영화가 있습니까.

"(한참 생각하다가) 실패를 안겨줬던 영화들이 더 많이 생각나곤 합니다. '고래사냥 2' 때는 내가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고, '흑수선'은 시대를 잘못 읽었다든가…. 내 인생이 원숙해지면 내 영화도 원숙해지겠지요."

―한때 한국 최고의 흥행감독에서 독립영화 감독이 됐습니다. 그래도 영화를 찍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화가 사람들의 삶에 자그마한 빛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 1000명 관객이라도 본성을 일깨우고 정서를 키울 수 있는 영화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죠."

● '적도의 꽃'은…

건너편 동 그녀 훔쳐보는 M… 아파트의 익명성·폐쇄성 고발

아버지로부터 생활비를 받아 혼자 사는 미스터 M(안성기)은 아파트 건너편 동에 혼자 사는 선영(장미희)을 카메라와 망원경으로 훔쳐보며 흠모한다. 선영의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가 유부남임을 알게 된 M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선영과 유부남을 떼어놓는다. 상심한 선영은 플레이보이 준환(신일룡)을 만나고, M은 준환마저 응징한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편집광이 돼버린 M은 선영을 강으로 끌고 가 "더러운 몸을 씻으라"고 윽박지른다.

촬영 당시 한국 최고급 아파트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아파트의 익명성과 폐쇄성을 고발하며 고급 승용차와 오토바이, 카메라와 오디오 같은 물질문명을 등장시켜 인간 본성에 대한 둔중한 화두를 던졌다. 첫 쇼트에서 카메라가 아파트 밖에서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지막 쇼트에서는 거실에서 밖으로 나오는 장면이 가히 '충격적'인 인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