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선의 시네마 업데이트] 스릴러물 '10억'

매주 수많은 영화들이 쏟아진다. 뭘 볼까 고민하다보면, 영화를 줄거리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줄거리만 들어도 그 정체가 그려지는 영화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번주 개봉하는 한국영화 '10억'도 일단은 그렇다. 박희순, 박해일, 신민아, 이민기, 정유미 등 나름 싱싱한 캐스팅 조합을 지닌 이 영화의 줄거리는 심히 단순하다. 제목처럼 10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인터넷 방송국의 리얼리티 쇼가 호주의 사막에서 열린다. 추첨에 뽑혀 참가한 사람은 8명. 방송국 담당 PD와 촬영기사까지 도합 10명이 사막을 헤매며 게임을 하던 중 참가자가 하나둘 씩 죽어간다.

어이하여 철 지난 리얼리티 쇼? 케이블 프로그램도 아니고 이걸 영화로? 등의 생각이 들 때 즈음 영화의 초반이 흘러간다. 하지만 그렇게 방심하고 있으면 곧 '10억'은 마구 달린다. 아주 씩씩거리면서, 귀찮고 자잘한 설정들은 잔인하게 쳐내며, 오로지 종착지를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정체가 벗겨지는 마지막 10분에 이르면 처음과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중요한 건 참가자들이 어떻게 죽느냐다. 영화는 게임쇼에서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생존자 유진(신민아)의 기억으로 얘기의 조각을 맞춰간다. 그리고 참가자들이 우리에 갇힌 실험쥐처럼 일방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우선 첫 번째 게임의 탈락자가 죽고, 그의 시체를 발견한 여성 참가자는 경악해 게임을 그만하겠다고 반항하다 두 번째 희생양이 된다. 게임을 주관하는 장PD(박희순)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그 이후 나머지 참가자들을 윽박지르는 장PD의 진정한 쇼타임이 시작된다. 게임쇼는 사실상 참가자들을 향한 장PD의 복수극이었고, 게임에 참가한 8명은 추첨된 게 아니라 일부러 모집됐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장PD에게 찍힌 이들 8명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리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라며 참가자들이 울부짖어도 장PD는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참가자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서로 견제하고 배신하며 느닷없는 로맨스까지 불태우더니, 마침내 살기위해 누군가를 죽음 속에 방치하는 도덕적 시험에 들게 된다.

'정글쥬스' '강적'의 조민호 감독이 연출한 스릴러 '10억'은 역시 전작들처럼 복잡하지 않다. 게임쇼의 설정 자체가 기발한 것도 아니고, 인물들은 닥치는 대로 죽는다. 8명이나 되는 젊은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다. 치밀한 설정과 디테일로 무장한 척하지만 뜯어보면 이런 무대포, 막가파식 스릴러가 없다. 도망치려는 참가자들과 감시하는 장PD 사이에 치열한 두뇌게임도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엔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사람과 상황, 그리고 장면들 사이를 고집스럽게 헤쳐 나가는 기운이 가득하다. 투박하고 거칠고 못됐지만 매력적인 나쁜 남자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재난이 인간에 의한 공격이자 실험"이라고 외치는 이 영화에 찍힌 건 사실상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고야 만다는 집념이다. 그래서 후반부 장PD의 복수극의 이유가 밝혀지면서 이 영화는 게임 스릴러가 아닌 인간성에 관한 영화가 된다. 어떤 순간에도 살아남을 수 있고, 어떻게 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인간의 치졸함에 관한 영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