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페이퍼진] 임정식 기자의 시네마 오디세이 '10억'

넘치는 액션 - 사라진 스릴

10억. 서민들이 팔자를 고칠 수도 있는 거액이다. 이 10억을 놓고 전대미문의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진다. 인터넷방송 주최의 서바이벌 게임쇼에 성별, 나이, 직업이 제각각인 8명(박해일 신민아 이민기 정유미 이천희 고은아 등)이 초대된다. 장소는 육지 속의 무인도인 호주 '퍼스(Perth).' 사막과 밀림, 강, 바다가 에워싸고 있는 곳이다.

게임의 룰은 엄혹하다. 각 라운드마다 탈락자는 죽어야 한다. 주최자인 장 PD(박휘순)가 일방적으로 정했다. 실제로 참가자들은 1라운드가 끝나자마자 한 명의 시체를 발견한다. 모두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알아챈다. 장 PD에게 항의하다가 또 한 명이 희생된다. 장 PD는 인터넷으로 이 게임쇼를 생중계한다. 게임은 마지막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쯤 되면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기대한다. 뭔가 복선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인물들 사이에 치밀한 두뇌싸움이 벌어지고, 마지막에 대단한 반전이 있을 것이다. 홍보 포스터에도 '스릴러'라고 돼 있지 않은가. 자, 죽음의 생존경쟁이 시작된다.

'10억'(감독 조민호)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TV에서 숱하게 보아온 방식이다. '10억'은 그 진행 방식의 익숙함을 대중성 확보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 그 의도가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미지수다.

여기서 '슬럼독 밀리어네어'(감독 대니 보일)가 떠오른다. '슬럼독...'은 퀴즈쇼를 기본 형식으로 한다. 인도 뭄바이 빈민촌의 18세 소년 자말이 TV의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해 문제를 맞히는 과정이 중심이다. 일정액의 상금을 내걸고 참가자를 모집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상금을 준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플롯은 유사하다. '10억'의 게임쇼 참가자들은 장 PD가 제출한 과제(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 깃발 차지하기, 화살 찾아오기 등)를 수행하고, '슬럼독...'의 자말은 퀴즈를 푼다.

상금 액수는 다르다. 하지만 100만 달러든 6억원이든, 한국과 인도에서 인생 행로를 바꾸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거액이 공짜로 주어질 리 없다. 당연히 난관이 뒤따른다. 자말은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사기죄로 체포되고, '10억'의 인물들은 호주의 광활한 자연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 임무 수행 방법과 과정에 영화의 재미가 있다. 두 영화의 장르는 다르지만, 유사한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 '10억'은 이를 어드벤처 영화처럼 전달한다. 참가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니면 장 PD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호주의 밀림과 사막을 뛰고 달린다. 보트를 타고 강을 지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멋진 풍광은 눈을 즐겁게 한다.

문제는 '10억'이 스릴러물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장 PD와 참가자들 혹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진다. 돈가방 앞에서 연인(?)을 살해하는 것처럼, 극한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능(악마성)에 대한 성찰도 엿보인다. 그러나 스릴러물로서 관객을 제대로 장악했는지는 의문이다. 각각의 사건들은 별 연관성이 없다. 그저 달력 속의 숫자처럼 흘러간다.

'10억'의 발상은 충분히 흥미롭다. 초반 전개도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서바이벌 게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영화는 오히려 엉뚱한 길로 빠진다. 스릴러물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느닷없는 로맨스와 배신, 우연한 사건이 이어지면서 맥이 끊어진다. 무엇보다 '전지전능한' 장 PD의 존재는 부담스럽다. 그는 어떻게 '손봐야 할' 8명을 꼭 집어 게임쇼에 초대했을까. 어떻게 참가자들의 행동을 손금보듯 알고, 필요한 곳마다 카메라를 설치했을까. 장 PD와 참가자들의 승부는 그래서 싱겁다.

'10억'은 복수극으로 마무리된다. 마지막에 반전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호주의 광활한 대지 위에서 너무 힘을 빼버렸다. 마지막 생존자 유진(신민아)을 비롯한 인물들은 사막과 정글과 강을 수없이 헤매다닌다. 스릴러인지 어드벤처 영화인지 모호해진다. 욕심을 버리고, 한 가지에 승부를 거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 필요하다.

< 기획취재팀ㆍ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