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우승 전문'이냐 '중고(中古) 신동'이냐?

바둑계가 모처럼 '극본 없는 활극' 한 편을 야심 차게 개봉한다. 제목은 '제5기 한국물가정보배 결승 3번기'. 이창호와 김지석이 공동주연하는 이번 작품의 주제는 '밥 먹듯 우승(137회)해 본 기사'와 '생애 첫 우승에 도전하는 기사' 간의 격돌이다. 그 밖에도 눈길 끄는 흥행 장치들이 제법 촘촘히 깔려 있다. 12일과 19일, 26일 밤 한국기원에서 세 차례 공연한다. 우승자에게 2500만원의 '주연료'가 약속된 '납량 블록버스터'의 시시콜콜 가이드.

◆김지석 신동 맞아?

만 6세 때 TV에 출연, 4점을 접히고 당대의 거목 조훈현을 쩔쩔매게 하였던 신동. 누구보다 빨리 프로가 돼 곧 세계를 제패하리라던 기대주. 하지만 프로 입단은 14세가 돼서야 이뤄졌고, 그 뒤로도 이렇다 할 실적 하나 없이 어느덧 청년이 돼 버린 '만년 유망주'. 올해 초까지만 해도 김지석 五단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그 '중고(中古) 신동(神童)' 김지석이 만 스물이 되는 올 들어 대폭발 중이다. 10일 현재 43승7패로 다승과 승률 및 연승(14) 3개 부문 모두 월등한 1위다. 97년 이창호 이후 12년 만의 '기록 3관왕' 출현을 기대해볼 만한 페이스. 명인전 천원전 등 무려 7개 기전 본선에 올라 있다. 이번 결승전은 본격 개화(開花)에 앞서 한 차례 미리 터뜨려보는 꽃봉오리쯤 될까.

◆이창호, 배터리 소진?

10년 전쯤의 이창호는 신(神)과 동격이었다. 어쩌다 한 판을 지면 엄청난 사건으로 취급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준우승 전문'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2005년 이후 국제무대서 8연속 준우승을 겪으며 철석같던 카리스마가 무너져 버렸다. 타이틀 3개를 보유 중이지만 왕위전은 2년, 전자랜드배는 1년 넘게 중단 상태다. 최근 1년 사이의 영토 확장은 바둑왕전(2009년 3월)뿐이었다.

이창호로선 이번 대회를 반드시 제패해야만 할 또 하나의 당위가 있다. 이른바 '사이클링 히트'의 완성이 걸려 있는 것. 그는 만 23년간 무림을 누비며 물가정보배 단 1개를 제외한 모든 타이틀을 섭렵했다. 2005년 원년 대회 때 결승서 박영훈에 패해 준우승한 이후 4년 만에 우승 기회를 맞았다. 이탈리아 출신 산악인 메스너의 14좌 완등(完登)에 비유될 만한 찬란한 업적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우상'과 '키드'의 동상이몽

국내 랭킹은 이창호가 2위, 김지석이 8위. 둘은 지금까지 도합 네 번 칼을 섞어 네 번 모두 이창호가 이겼다. 특히 이번 결승의 전초전으로 주목받았던 지난 1일 바둑리그 맞대결서 김지석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완패했다. 이런 데이터들이 둘 간의 천적관계를 의미하는 것일지, 구시대의 일지(日誌)로 쑤셔박히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김지석은 대표적인 '이창호 키드'다. 김지석 출생 1년 전인 88년 이창호는 세계 최연소 우승(바둑왕전) 기록을 수립했다. 김지석이 프로세계에 첫발을 내딛던 2003년 이창호는 도요타덴소배, 춘란배 외에 국내 5개 기전도 석권하는 절정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뒤부터 선배는 멈춰 섰고 후배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 34세의 '우상'은 아직 건재함을 만천하에 보여주려 하고, 그를 막아선 20세의 '키드'는 자신의 세상이 왔음을 선포할 태세다. 이 기이한 동상이몽극의 진짜 주연배우는 과연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