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선의 시네마 업데이트] '불신지옥', 공포-환각 '소름 쫙'

고백하건대 한국공포영화를 안 본지 꽤 됐다. 김하늘 주연의 '령' 이후 '해부학 교실'을 마지막으로 봤으니 심하긴 했다. 이유는 한국공포영화에 질려서...가 아니라 무지 겁이 많아서다. 남들은 유치하다는 한국공포영화의 온갖 상투적 장치들에 혼자만 시달려서, 7박 8일 잠 못 자고 악몽 꾸는 체질이다. 그러니 내가 공포영화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어불성설인데, 이런 주제에 어쩌다 도전해버린 올해의 한국공포영화가 있다. '한국공포영화의 희망'이자 '올해의 신인 감독'으로 벌써 점 찍혔다는, 이용주 감독의 '불신지옥'이다.

영화는 서울에서 힘겹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는 희진(남상미)의 불안한 일상으로 시작된다. 새벽 무렵 피곤에 절어 잠 든 희진의 휴대폰이 울린다. 지방에서 엄마와 살고 있는 동생 소진(심은경)이다. "언니 괜찮아?"라는 야릇한 동생의 전화를 끊고 또 잠이 든 희진. 아침 무렵 이번엔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소진이가 없어졌어"라며 울먹이는 엄마. 동생을 찾으러 집으로 돌아간 희진은 그날부터 끔찍한 광경들을 본다.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열심히 기도하자"고만 하는 광신도 엄마(김보연), 느닷없이 아파트 창문 앞에서 벌어진 한 여자의 자살, 그리고 자꾸 보이는 환각들. 희진의 신고로 소진의 사건을 맡게 된 담당형사(류승룡)도 수사를 할수록 납득하지 못할 일들이 속출한다.

희진이 동생 소진이 신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소진과 친했다는 아파트 주민 여성이 자살하면서 이 영화는 서서히 관객을 두 가지 불신의 세계로 인도한다. 희진의 엄마를 통해 보여주는 가공할 만한 기독교적인 맹신과 신들린 아이 소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아파트 주민들의 지독한 무속적 맹신. 그러나 가족 혹은 주변의 삶을 희생시키는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것은, 그 어느 쪽도 완전한 평화와 안식을 주지 않는다. 결국은 아무도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불신의 지옥을 만들 뿐이다. 그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희진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지옥 그 자체다.

또 한 가지. '불신지옥'을 보고 있으면 낡은 복도식 아파트가 주는 공포를 견디기 힘들 것이다. 가까운 듯해도 완전히 단절된 이 한국적 주거공간에서 태어난 구조적 불신의 공포는 그 어떤 원혼의 습격보다도 소름끼친다. 창문으로 누군가의 그림자만 스쳐도 기억나게 될 '불신지옥'의 모든 장면들은 '일상이 공포'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한국사회가 오래도록 품어왔던 기괴한 단면을 이렇게 단숨에 뒤집어 보이니, '불신지옥'은 발상과 결과물 모두 참으로 무서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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