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페이퍼진] 임정식 기자의 시네마 오디세이 '불신지옥'

공포영화라면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끔찍한 장면이 연상된다. 살인이 난무하고, 가위눌린 신음과 머리채를 길게 늘어뜨린 귀신(원혼)의 모습도 떠오른다. 여기에 음산한 음악이 더해져 관객들을 섬뜩한 공포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관객들은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소름 돋아나는 팔을 문지르며 더위를 잊는다. 여름에 공포영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다.

'불신지옥'(감독 이용주)은 전통적인 공포영화 문법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겨나가는 장면이 거의 없다.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공포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소진(심은경)이 작둣날에 손을 얹은 후 피 한 방울이 똑 떨어지거나, 그 피로 부적을 만드는 게 전부다. 무차별 살인, 공포감에 떠는 희생자의 모습도 찾기 힘들다.

물론 사람들이 죽고, 귀신이 등장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실도 나온다. 여성 캐릭터가 중심을 이룬다는 점도 익숙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장르영화의 관습을 배반한다. 여성의 '비명 데시벨'이 매우 낮다. 거의 없다. 엽기적인 장면이래야 신들린 소진이 생고기를 베어무는 정도다. 공포영화인데도 사건의 대부분이 한낮에 벌어지고, 도심 아파트가 공간 배경인 점도 독특하다. 여러 면에서 '장화, 홍련'과 유사하다.

이렇다할 대단한 사건도 없이, '불신지옥'은 관객을 공포의 세계로 이끈다. 저력이 만만치 않다.

그 비결은 우선 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불신지옥'은 공포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종교라는 묵직한 소재를 끌어들인다. 기독교(극단적이고 편협한 광신도)와 무속신앙의 갈등이다. 하지만 영화는 종교라는 외투를 빌려 입었을 뿐이다. 내면적으로는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 허망한 꿈을 아프게 조명한다.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인물을 통해 우리 사회의 통증을 부각시킨다. 비판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사회성을 내포한 공포영화라는 점에서 '불신지옥'은 히트작 '여고괴담' 시리즈와 유사하다. 만듦새는 훨씬 정교하다. 그러나 결말에서 등장한 모성애는 너무 갑작스러워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야기 전개 방식도 흥미롭다. 공포물과 미스터리 수사물이 적절히 섞여 있다. 서울에 사는 대학생 희진(남상미)이 어느 날 새벽 고향의 엄마(김보연)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동생 소진이 실종됐다는 것이다. 희진은 부랴부랴 집으로 내려가 범인을 색출하려고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소진과 엄마를 둘러싼 비밀이 하나씩 벗겨진다. 마치 '살인의 추억'을 보는 듯하다.(이용주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여기서 감독은 신인답지 않게 치밀하고 신중하다. 일회적 충격 요법을 최대한 자제한다. 대신 사건을 잘게 썰어 촘촘하게 배치한다. 사자가 사냥감을 향해 접근할 때의 발걸음과 같다. 관객은 사냥감의 운명을 지켜보듯이, 사건 해결 과정을 긴장하며 바라본다. 단편적인 상황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로 공포감을 자아낸다. 희진이 침대 밑에서 닭의 잘린 목을 발견하는 장면처럼, 속도를 한 템포 늦추거나 빠르게 함으로써 관객의 예상을 배반하는 편집도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배우들의 고른 연기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공포영화답게, 스타 배우는 없다. 하지만 남상미와 심은경은 어린 나이답지 않은 호연을 보여줬다. 특히 심은경은 작두타기, 생고기 씹어먹기와 같은 연기를 무리없이 소화해내 충무로의 기대주로 등장했다. 류승용, 김보연, 장영남과 같은 중견배우들의 호흡도 썩 괜찮았다.

'불신지옥'은 묵직한 소재,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조화, 연출과 편집, 배우들의 호연이 두루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이용주 감독은 군더더기 없이 세련된 연출로 웰메이드 호러영화를 빚어냈다. 올해 손꼽을 만한 데뷔작으로 기록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다만 강약의 리듬 변화 없이 단조로운 호흡으로 전개되는 점은 아쉽다. 딱히 떠오르는 강력한 이미지가 없다. 뚝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한발 뒤로 물러선 듯 타협적인 자세를 취한 결말도 마찬가지다.

< 기획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