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일가, 가족사 담은 바둑해설집 낸다

이세돌 일가(一家)가 열흘쯤 전부터 눈에 띄게 분주해졌다. 온 가족이 총동원돼 무엇을 하는 것일까. 책을 펴내기로 했단다. 이세돌 필생의 명국을 모아 집대성한 해설집이다. 하지만 흔히 보아오던 그런 바둑책이 아니다. 일종의 가족 바둑사(史) 같은 품격을 담아 보겠다는 게 이들의 각오다.

가장 주목할 것은 출판사가 완전 배제됐다는 점. 하나부터 열까지 3남2녀 형제들이 작업을 분담한다. 막내이자 주인공인 이세돌(26)이 대국 선정과 해설, 장남 이상훈(34) 七단이 공동분석 및 총지휘, 작은누나 이세나(33) 아마7단이 기보정리 책임을 맡는다. 여기에 큰누나 상희(35)씨가 "어린 시절 세돌이 얘기 재미있는 거 많은데 내가 직접 쓸게"하고 나섰다. 컴퓨터 등 기술작업은 둘째형 차돌(29)씨가 자원했다. 두 누나는 모두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왔고, 차돌씨는 서울대 컴퓨터과 졸업생이다.

고향 전남 비금도에 계신 홀어머니(박양례씨·61)도 팔을 걷어붙였다. 상희씨는 "전화로 계획을 전해 듣곤 '이제 한 시름 덜었다'며 좋아하시더라"고 전했다. 두 달째 기사직 휴업 중인 막내가 걱정돼 연일 안부를 물어오던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가 세돌이 재주에 빠져 농사일은 늘 뒷전이었던 거 모를 거다"고 했다. 어머니의 옛 '가족사 증언'도 물론 수록될 참이다.

작업 분위기가 웬만한 다큐멘터리 제작 모습 뺨칠 만큼 진지하다. 이세돌이 큰형 이상훈을 상대로 해설할 동안 바둑판 장면과 육성을 세나씨가 캠코더로 찍는다. 촬영분을 세나씨가 컴퓨터 작업을 통해 참고도로 변환하면 이 七단이 감수(監修)하는 과정이 무슨 의식(儀式) 같다. 특히 이세돌의 열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 봉황고성배 출전차 중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도 11시까지 작업했다. 그는 "그간 책 내자는 유혹을 많이 받았었다. 평범한 책 내려 했으면 벌써 수 십권은 나왔을 것"이라며 즐거워했다.

제목도, 판형이나 쪽수도 결정된 게 없다. 30국 정도를 예정했는데 너무 공을 들이다 보니 한 판에 100페이지 가까운 양이 쌓이는 중이다. 총 3권, 작업기간 3개월이란 당초 구상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어린 시절 일화(逸話)와 사진 등 추가작업이 모두 끝나려면 6개월도 부족할 전망. 호주생활을 접고 한 달 전 귀국한 세나씨는 "바둑영어학원을 해 볼 생각이었는데 꼼짝없이 엮였다"며 웃었다.

바둑계로선 기사직 휴직 중인 이세돌이 확실한 '일거리'를 통해 안정을 찾았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 평소 인터넷 대국도 별로 즐기지 않는 이세돌은 그동안 도장에 나와 아이들 지도에만 매달렸다. "장사나 무역 일을 해보고 싶다"는 등 엉뚱한 말까지 하던 상황이었다. "동생이 책 작업에 흠뻑 빠져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뭉클하다. 이제야 잡념에서 해방된 것 같아 안심이 된다"(이세나씨).

이번 프로젝트의 총연출자 격인 이상훈은 "책을 만들어 돈을 번다든가 하는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몇 권을 찍을지, 정가를 얼마로 할지도 전혀 관심사항이 아니다. 식구들이 하나의 목표를 놓고 함께 작업하며 가족사랑을 확인하고 있다는 게 큰 보람"이라고 했다.

"편집이나 표지 등 안 해본 일을 맡아 걱정이다. 전문지식 부족으로 곧 한계에 부딪히겠지만 최대한 우리 힘으로 헤쳐나가기로 했다"(차돌씨)는 다짐도 신선하다. '가족이 만든 가족사(史) 중심 바둑해설집'이란 전혀 새로운 장르의 문화서적 한 권이 막 잉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