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아내의 죽음에 대처하는 이 남자의 자세

갑작스런 횡액(橫厄)은 미처 보지 못했던 삶의 먼지들을 일제히 피워올린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조용한 혼돈(감독 안토넬로 그리말디)'은 느닷없이 아내와 사별한 남자가 혼돈의 시기를 매우 색다르게 보내는 모습을 그렸다. 이 사내는 어수선한 삶의 한가운데 차분히 앉아 먼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쪽이다.

피에트로(난니 모레티)는 어느 날 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진 여자를 구해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마당에 쓰러져 숨져 있고 어린 딸은 엄마 곁에 없던 아빠를 원망한다. 장례를 치르고 난 피에트로는 딸을 손수 등교시키고 학교가 파할 때까지 학교 앞 벤치에서 딸을 기다린다. 매일 학교 앞에 앉아 있는 그에게 낯선 풍경들이 조금씩 눈에 익어간다. 친구도 처제도 회사 중역도 그를 만나러 학교 앞 벤치에 찾아온다. 어느 날 그가 바닷가에서 구해줬던 여자가 찾아온다.

홀로 남겨진 피에트로는 엄청난 혼돈에 휩싸이지만, 아내의 죽음을 (적어도 카메라 앞에선) 슬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아내의 컴퓨터에 남은 낯선 이메일도 읽지 않고 모두 지워버린다. 딸의 학교 앞에서 새로 시작한 일상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사람과 풍경이 등장한다. 엄마 손을 잡고 등교하는 다운증후군 아이, 매일 같은 시각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그의 단골이 되는 샌드위치집 주인들이다. 그는 딸에게서 "올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빠가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문득 자신이 너무 오래 벤치를 지켰음을 깨닫는다. 영화 말미, 구해줬던 여자와의 격렬한 정사는 그의 혼돈이 결코 조용한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주연배우 난니 모레티의 호연이 돋보인다.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배우로 깜짝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