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옷 여인, 누굴 기다리고 있을까

《박항률》전(展)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 전시장은 안개에 싸인 듯했다. 작가가 숨결을 불어넣은 캔버스 속 여인들이 몽환적인 빛 속에 고요히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에서 신화(神話) 속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박항률의 작품은 몇점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앳된 소녀나 성숙한 여인이 등장한다. 단발머리를 한 앳된 소녀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 1년간 내려가 있던 경북 김천에서 만난 사촌누이의 모습이다. 작가의 부친은 아들이 만화가가 되겠다며 공부를 게을리하자 농사나 배우라며 고향으로 보낸 것이다.

서울에서 자란 박항률은 고향에 내려가 새로운 눈을 떴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의 물결과 다디단 향을 내며 익어가는 과수원의 과일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작가는 "그때 그 1년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작품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고향에서 만난 사람이 사촌 누이였다. 책을 좋아하고 조용했던 사촌누이는 구루병으로 힘겨운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림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은 마흔다섯에 세상을 떠난 작가의 어머니를 닮았다. 박항률은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면 아이들이 '영화배우 왔다'며 몰려나올 정도로 미인이셨다"고 기억했다. 아름다운 잔상을 남기고 숨진 사촌누이와 어머니의 모습이어서인지 박항률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와 여인은 애잔함을 안긴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그린 회화와 인물 조각이 함께 나왔으며 신작 40여점도 선보이고 있다. 3년 만에 마련한 전시로 전에 없이 대작들이 많다. 작가는 "이번처럼 대작을 많이 내놓은 전시가 없었다"며 "처음에는 작품이 커서 의자 위에 올라가 작업하느라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신이 났다"고 말했다.

박항률은 "작품을 하면서 자연과 합일(合一)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다"며 "앞으로도 자연을 가까이하는 작품을 하겠다"고 말했다. 작업 중 틈틈이 시를 써온 작가는 전시회와 함께 시집 《그림의 그림자》(도서출판 시작)도 냈다. 전시는 27일까지 열린다. (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