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 페이퍼진] 임정식 기자의 시네마 오디세이
입력 : 2009.09.14 10:17
| 따뜻한 강물같은 사랑의 모습 이젠… |
그해 3월. 많은 사람이 울었다. 어느 청순한 여성의 애달픈 사랑 때문이었다. 한겨울 눈발처럼 펑펑 울지는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소리 죽여 눈물을 훔쳤다. 가슴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멜로영화 '국화꽃 향기'(2003)의 여운은 그렇게 깊고 짙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희재는 담담했다. 그런 척했다. 위암을 선고받았는데도, 애틋한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데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죽음을, 이별을 준비했다. 그리고는 휠체어에 앉아서, 연인이 둘러준 담요로 어깨를 감싼 채, 그의 손을 잡고 해 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과 작별했다. 관객들은 슬픔을 참으며 홀로 남을 연인을 위해 세심하게 신경쓰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희재를 쉽게 떠나보내지 못했다. 더러는 마음 한 켠이 따뜻하게 물들기도 했다.
영화배우 고 장진영. 그녀는 '국화꽃 향기'의 희재였고, 희재는 곧 그녀였다. 각박한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순애보로 관객들의 마음의 현을 울렸다. 그 모습 그대로 팬 곁을 떠나갔다.
영화는 단순하고 소박했다. 100만부 이상 팔린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두고 이런저런 뒷말이 많았다. 그러나 장진영은 돋보였다. 희재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씩씩한 여대생이었다. 책읽기를 좋아해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다. 밝고 쾌활하면서도 풀잎처럼 순수한 희재의 모습은 현실 속의 장진영 그대로였다. 따로 연기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됐다. 그 자연스러운 연기는 영화를 빛나게 만들었다.
운명은 가혹했다. 희재는 큰 아픔을 겪었다. 약혼자와 부모를 사고로 잃었다. 세상과 절연하고, 집안에만 칩거했다. 그 무렵이었다. 그녀를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대학 선배 인하(박해일)가 다가왔다. 라디오 PD 인하는 자신의 사랑을 방송을 통해 희재에게 알렸고, 조심스럽게 희재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희재는 힘들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추운 겨울의 골짜기를 막 지나온 듯했다. 푸른 봄, 사랑의 새싹이 막 돋아났다. 그러나 희재의 사랑은 허락되지 않았다.
장진영의 사랑은 희재를 닮았다. 뒤늦게 만난 사랑이었고, 병마와 싸우며 지킨 사랑이었고, 끝내 이별해야 하는 사랑이었다. 사후에 전해진 그녀의 결혼과 혼인신고 소식은 다시 한번 팬들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영혼을 바쳐 사랑한 연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순애보였다. 그녀가 사랑했고,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는 '국화꽃 향기'만큼이나 웅숭깊은 사랑으로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장진영은 다작의 배우가 아니었다. 그러나 멜로, 공포, 코미디,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에서 빼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99년 '자귀모'로 영화계에 데뷔했고 이듬해 '반칙왕', '싸이렌'에 잇달아 출연했다. 그리고 공포영화 '소름'(2001)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배우가 됐다. 이후엔 '오버 더 레인보우', '싱글즈', '청연',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 멜로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만인의 연인으로 자리잡았다. 어느 작품에서나 사랑하고 싶은 연인, 친숙한 누이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싱글즈'에서는 29세 싱글 나난으로 출연해 두번째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청연'(2005)은 안팎으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장진영은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 박경원을 맡았다. 운명에 맞서고, 시대를 뛰어넘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청연'의 제작은 순탄치 않았다. 느닷없는 친일 시비로 휘청거렸고, 제작비 문제로 수년간 촬영하지 못했다. 이때 장진영은 꿈쩍하지 않았다.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2관왕 여배우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출연 제의를 단호하게 뿌리쳤다. 오직 '청연'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영화는 비록 흥행에서 실패했지만, 장진영이 지켜낸 의리는 훈훈한 미담으로 회자됐다.
2006년 선보인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영화의 유작이 됐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 변신은 파격적이었다. 변두리 룸살롱 아가씨 연아로 출연해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살았다. 약혼녀가 있는 건달과 장난처럼 연애를 시작했고, 싸우고 화해하기를 되풀이하면서 속정이 들었다. 거칠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 짙은 화장, 헝클어진 머리, 걸쭉한 욕설로 다가온 장진영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많은 영화 속에서 장진영의 사랑은 깊었다. 지고지순한 순정을 가진 여인의 사랑이었다. '국화꽃 향기'의 희재, '오버 더 레인보우'의 연희,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연아는 모두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현실에서도 장진영의 사랑은 아름답고 뭉클했다. 삭막한 세상에 따뜻한 강물같은 사랑의 모습을 남겨놓았다. 그녀는 영원히 떠났다. 하지만 영화는 남았다. 팬들은 이제 영화를 통해서 그녀를 추억할 것이다. 육신은 비록 이승을 떠났지만, '영화배우' 장진영은 팬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언제나 꿈을 주고 사랑을 전하던 아름다운 배우의 모습으로.
< 기획취재팀ㆍdada@sportschosun.com>
참 이상한 일이었다. 희재는 담담했다. 그런 척했다. 위암을 선고받았는데도, 애틋한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데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죽음을, 이별을 준비했다. 그리고는 휠체어에 앉아서, 연인이 둘러준 담요로 어깨를 감싼 채, 그의 손을 잡고 해 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과 작별했다. 관객들은 슬픔을 참으며 홀로 남을 연인을 위해 세심하게 신경쓰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희재를 쉽게 떠나보내지 못했다. 더러는 마음 한 켠이 따뜻하게 물들기도 했다.
영화배우 고 장진영. 그녀는 '국화꽃 향기'의 희재였고, 희재는 곧 그녀였다. 각박한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순애보로 관객들의 마음의 현을 울렸다. 그 모습 그대로 팬 곁을 떠나갔다.
영화는 단순하고 소박했다. 100만부 이상 팔린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두고 이런저런 뒷말이 많았다. 그러나 장진영은 돋보였다. 희재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씩씩한 여대생이었다. 책읽기를 좋아해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다. 밝고 쾌활하면서도 풀잎처럼 순수한 희재의 모습은 현실 속의 장진영 그대로였다. 따로 연기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됐다. 그 자연스러운 연기는 영화를 빛나게 만들었다.
운명은 가혹했다. 희재는 큰 아픔을 겪었다. 약혼자와 부모를 사고로 잃었다. 세상과 절연하고, 집안에만 칩거했다. 그 무렵이었다. 그녀를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대학 선배 인하(박해일)가 다가왔다. 라디오 PD 인하는 자신의 사랑을 방송을 통해 희재에게 알렸고, 조심스럽게 희재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희재는 힘들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추운 겨울의 골짜기를 막 지나온 듯했다. 푸른 봄, 사랑의 새싹이 막 돋아났다. 그러나 희재의 사랑은 허락되지 않았다.
장진영의 사랑은 희재를 닮았다. 뒤늦게 만난 사랑이었고, 병마와 싸우며 지킨 사랑이었고, 끝내 이별해야 하는 사랑이었다. 사후에 전해진 그녀의 결혼과 혼인신고 소식은 다시 한번 팬들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영혼을 바쳐 사랑한 연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순애보였다. 그녀가 사랑했고,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는 '국화꽃 향기'만큼이나 웅숭깊은 사랑으로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장진영은 다작의 배우가 아니었다. 그러나 멜로, 공포, 코미디,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에서 빼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99년 '자귀모'로 영화계에 데뷔했고 이듬해 '반칙왕', '싸이렌'에 잇달아 출연했다. 그리고 공포영화 '소름'(2001)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배우가 됐다. 이후엔 '오버 더 레인보우', '싱글즈', '청연',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 멜로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만인의 연인으로 자리잡았다. 어느 작품에서나 사랑하고 싶은 연인, 친숙한 누이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싱글즈'에서는 29세 싱글 나난으로 출연해 두번째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청연'(2005)은 안팎으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장진영은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 박경원을 맡았다. 운명에 맞서고, 시대를 뛰어넘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청연'의 제작은 순탄치 않았다. 느닷없는 친일 시비로 휘청거렸고, 제작비 문제로 수년간 촬영하지 못했다. 이때 장진영은 꿈쩍하지 않았다.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2관왕 여배우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출연 제의를 단호하게 뿌리쳤다. 오직 '청연'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영화는 비록 흥행에서 실패했지만, 장진영이 지켜낸 의리는 훈훈한 미담으로 회자됐다.
2006년 선보인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영화의 유작이 됐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 변신은 파격적이었다. 변두리 룸살롱 아가씨 연아로 출연해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살았다. 약혼녀가 있는 건달과 장난처럼 연애를 시작했고, 싸우고 화해하기를 되풀이하면서 속정이 들었다. 거칠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 짙은 화장, 헝클어진 머리, 걸쭉한 욕설로 다가온 장진영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많은 영화 속에서 장진영의 사랑은 깊었다. 지고지순한 순정을 가진 여인의 사랑이었다. '국화꽃 향기'의 희재, '오버 더 레인보우'의 연희,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연아는 모두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현실에서도 장진영의 사랑은 아름답고 뭉클했다. 삭막한 세상에 따뜻한 강물같은 사랑의 모습을 남겨놓았다. 그녀는 영원히 떠났다. 하지만 영화는 남았다. 팬들은 이제 영화를 통해서 그녀를 추억할 것이다. 육신은 비록 이승을 떠났지만, '영화배우' 장진영은 팬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언제나 꿈을 주고 사랑을 전하던 아름다운 배우의 모습으로.
< 기획취재팀ㆍ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