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선의 시네마 업데이트] 최강희-김영애의 '애자'

'내 인생의 웬수'엄마와 딸…그리고 눈물

　8년 전 독립을 했다. 최근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가장 큰 스트레스는 엄마였다. 대화가 안 되는 동문서답의 여왕이며 전화도 본인 용건만 간단히, 같이 있으면 끊임없이 뭔가를 시키는 엄마. 과연 엄마라는 스트레스는 견디기 쉽지 않았다. 8년간 밖에서 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딸과 그게 눈에 가시인 엄마는 결국 밤마다 미친 듯이 감정적 소모전을 벌였고, 두 달 후에야 겨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딸에게 '애자'는 무지하게 찔리는 구석이 많은 영화다.

주인공 애자(최강희)는 학창시절 깻잎머리를 하고도 '부산의 톨스토이'로 글 좀 쓴단 소리를 들었던 소설가 지망생. 서울로 상경해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이룬 건 별로 없다. 그 옛날 지방 신문 당선 경력 하나와 그저 그런 남자친구 하나, 그리고 빚만 쌓여 있다. 그렇다고 집에 내려가긴 싫다. 오랜 세월 오빠만 극진히 편애해온 엄마 영희(김영애)에게 쌓인 게 더 많아서다. 비만 오면 "시 쓰러 간다"며 학교 빠지기 일쑤였던 고교 시절부터 애자를 단속해 온 '지상 최강의 적수' 엄마. 그 엄마가 갑자기 쓰러진다. 위암이 재발한 것이다.

4년 간 400명의 모녀들을 인터뷰한 시나리오가 바탕이 됐다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당연하게도 '내 인생의 웬수' 엄마와 딸의 관계다. 아들과 어머니 혹은 아들과 아버지라면 한 마디로 끝날 일도 구구절절 다투고 설명해야 하는 것이 딸과 엄마의 관계. 물론 온유하고 겸손한 모녀관계도 있겠지만.... 확실히 성별이 다른 종자들은 이해가 힘든 특수 관계다.

암이 재발한 엄마를 돌보러 근 10년 만에 집에 온 애자와 엄마 사이엔 전쟁과 휴전이 번갈아 벌어진다. "나한테 해 준게 뭐 있다고!"라며 취직도 결혼도 싫다고 바락바락 대드는 애자에게 "글 써서 팬티 한 장이라도 사봤냐"고 철퇴를 가하는 엄마 영희. 늘 직격탄을 날리는 그들 싸움의 껄끄러운 뒤끝이나 화해의 풍경은 엄마와 딸의 시선 양편에서 모두 읽히는 것이 많다. 신인 정기훈 감독은 남성인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들을 제법 꼼꼼한 관찰과 조사로 완성시켰고, 엄마와 딸 각자의 세계를 비추며 비교적 공평하게 그들 내면을 들여다본다. 실제 모녀처럼 치고받는 최강희, 김영애 콤비가 그 소소한 일상의 결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어쩌면 세상살이의 억울함을 모조리 발산하고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관계를 담은 이 영화는 성별을 불문하고 관객의 심장을 건드릴 만하다. 그런데 어쩌나. (제작진의 의도완 달리) 나는 이 영화를 엄마와 함께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미안하고 죄송하고 속상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