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 페이퍼진] 시네마 오디세이 : 이태원 살인사건

미궁에 빠진 12년전 살인사건 섬세하게 재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장단점이 명확하다. 대개 소재가 자체가 흥미롭다.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갖추고 있다.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쉽고, 그래서 흡인력이 강하다. 반면 실화의 사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일정한 제약이 따른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실화 소재 영화다. 제목이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199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태원 햄버거 가게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평범한 대학생 중필이 화장실에서 끔찍하게 살해된다. 용의자는 2명. 10대 한국계 미국인 피어슨(장근석)과 알렉스(신승환)다. 미육군 수사당국은 피어슨을 범인으로 결론내렸다. 그러나 사건을 넘겨받은 박대식 검사(정진영)는 의문에 빠진다. 수사를 진행할 수록 알렉스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알렉스와 피어슨은 서로 상대가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진실은 뭘까.

'이태원 살인사건'은 사실적이다. 12년 전 사건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화장실에서 대학생이 피살되는 끔찍한 장면과 흥건한 피로 시작된다. 마지막에 같은 장면을 다시 보여준다. 용의자 2명이 무죄판결을 받은데 대한 의문이 담겨 있다. 영화는 실제 사건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사건 발생, 수사, 재판 과정이 시간순으로 전개된다. 홍기선 감독은 관련자 인터뷰와 4년간의 정밀한 조사를 거쳐 영화를 완성했다.

박 검사는 고군분투하고, 고뇌한다. 둘 중에서 누가 범인인가를 가려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실패한다. 법원의 판결은 이미 나와 있다. 종결된 사건이다. 영화가 뒤늦게 범인을 색출해 낼 수는 없다. 더구나 용의자들은 현재 살아 있다. 조심스럽다.

감독의 진짜 관심은 다른 데 있다. 많은 질문을 던진다.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죄의식조차 없는 젊은이들, 한미관계, 인종문제를 슬쩍 건드린다. "이길 수는 없지만 지지는 않게 해드리겠다"는 변호사의 말은, 자본에 휘둘리는 사법체계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영화는 나름대로 뚝심이 있다. 집중력을 갖고 진행된다.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자아낸다. 수준급 배우들의 고른 연기는 긴박한 스토리를 적절하게 뒷받침해준다. 검사와 변호사의 법정 공방 장면도 치열하고 흥미롭다.

그런데 메시지는 다소 모호하다. 사회 비판이든 인물 내면 조명이든, 끝까지 밀고나가지 않는다. 공간(이태원)과 인물(한국계 미국인 10대)은 한미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법체계를 문제삼는 것도 같다. 그러나 명확하지 않다. 결말이 정해진 소재를 굳이 영화로 제작하려고 한 의도가 선뜻 잡히지 않는다. 욕심이 많은 탓인지 모른다.

또 있다. 박 검사는 이 살인사건에 왜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걸까. 그 이유를 시원스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들은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다. 카메라가 제3자로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 시선이 뒤섞여 있다. 알렉스와 피어슨의 내면에 대한 궁금증도 남는다. 관객과의 거리가 어정쩡한 이유다. 초등학생 유괴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 미제로 남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지점이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고지식하다. 실제 사건을 뛰어넘기 위한 영화적 장치가 거의 없다. 그래서 사실성을 확보했다는 장점이 있지만, 영화적 재미나 메시지는 조금 덜하다. 장르로 보면, 범죄-미스터리물이다. 소변 보는 자세를 둘러싼 검사와 변호사의 법정 공방과 같은 코믹 에피소드가 적절한지도 따져봐야 할 듯하다. 차라리 우직하게, 정공법으로 밀고나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기획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