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맞은 바둑계에 '17세 김승재 경계령'

"김승재를 조심하라." 홍익동 바둑동네에 만 17세 소년 경계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92년 8월생으로 국내 프로기사 239명 중 세 번째로 어린 나이. 웃을 때면 볼우물이 파이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이 소년을 가리켜 원성진 허영호 등 중견 선배들은 "엘리트 코스를 착실하게 밟아가고 있다"고 평한다.

21일 현재 올 시즌 41승12패로 승률 2위, 다승 3위에 나서 있다. 연승 포함 12년 만의 3관왕을 노리는 김지석(52승 13패)을 승률부문서 턱밑까지 추격해 간 것이다. 김승재 77.4%, 김지석 80.0%로 약 2.6% 포인트의 차이. 7.7%까지 벌어졌던 격차가 좁혀지자 김승재 三단은 "꼭 따라잡을 것"이라며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김승재의 '근거지'는 국내 최대기전인 제37기 명인전이다. 3연승으로 A조 선두다. 남은 상대는 김지석과 홍성지로, 둘 중 하나만 꺾어도 4강토너 진출이 결정된다. 두 강타자와의 통산전적에서 김승재는 각각 2연승으로 앞서 있다. 한 달여 전 벌어졌던 농심배 국내 예선서도 그는 대망의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바둑리그서의 존재감 또한 대단하다. 소속 팀 바투에서 5승(5패)을 기록 중인데, 이는 7개 팀이 임의로 선발하는 '자율지명' 선수 중 최다승에 해당한다. 그를 지명했던 김영환 감독은 "검토할 때 평소 공부량이 엄청나다는 걸 느끼곤 한다. 특히 균형감각은 당대 최고수준"이라며 끔찍이 대견해한다.

최근 상승세의 '비결'은 역시 꾸준한 노력에 있다. 그는 요즘도 출신도장인 양천대일에서 10시간 안팎의 하드 트레이닝을 매일 반복한다. 오가는 시간을 빼고 나면 쉴 틈이 거의 없는 일정. 동양공고 2년에 적(籍)을 걸어둔 그는 "학교 친구가 없는 것과 노는 시간이 부족한 게 가장 아쉽다"고 말한다.

자신보다 더 어린 프로는 93년생인 박정환과 김기원 단 2명뿐이다. 본인은 "나이는 의식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결코 지고 싶지 않은 상대'에 기어코 박정환의 이름이 나왔다. 언젠가 하루에 2판(삼성화재 예선결승 및 바둑리그)을 박정환에게 패하던 날엔 분해서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박정환과의 통산전적은 3승3패. 그는 국내외 톱 프로들과의 상대기록을 모조리 외우고 있다.

하지만 김승재의 국제대회 성적표는 아직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작년과 올해 LG배, 금년도 비씨카드배 등 세 차례 통합예선을 통과하는 동안 외국기사를 상대로 9승5패를 거뒀는데 본선에선 3전3패에 머물렀다. 그가 "앞으로 외국프로와는 죽기 살기로 싸울 것"이라며 투지를 불사르고 있는 이유다.

바둑돌을 처음 잡은 것은 만 6세 무렵. 산만한 성격을 고쳐주려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동네 바둑교실을 찾은 것이 계기였다. 한국기원 연구생 생활 2년 3개월 만에, 1조 리그에 오르기 전 2조 4위 신분으로, 더욱이 본선 첫 출전 때 입단한 예는 극히 드물다. 명지중 2학년 때였다. 데뷔 2년 만인 2008년 가을 첫 우승(신예연승최강전)을 따냈다.

17세 소년은 "엄마에게 세계 우승 트로피 안겨 드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몇 년 전 집안에 풍파를 겪은 이후 국악인인 엄마의 외아들에 대한 사랑은 더욱 끔찍해졌다. 지난해 봄 백담사에서 LG배가 열렸을 때 열 일 제쳐놓고 내려와 하루 종일 기도하는 모습으로 결과를 기다리던 바로 '그 엄마'다.

김승재가 새벽에 집을 나설 때, 그리고 한밤중 도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는 손수 운전으로 전철역까지 오가며 아들을 실어나른다. "울 엄마 창(唱)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는 김승재는 농심배 1승 이상, 명인전 결승 진출 등을 올해의 당면 목표로 설정했다. 내년 아시안게임 출전 또한 그의 꿈. 오늘도 김승재는 바둑 돌밭에 파묻혀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