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못다 핀 사랑
입력 : 2009.09.22 03:15 | 수정 : 2009.09.22 05:59
내 사랑 내 곁에, 불꽃처럼 나비처럼
김명민의 앙상한 나신은 과연 놀라웠다. 저 이가 정녕 갑옷 입고 대첩을 치렀으며 메스와 지휘봉을 들고 야망을 불태우던 그 남자란 말인가. 감독과 배우 모두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20㎏ 감량'에 집중되는 것이 불편할 수 있겠으나 스스로를 먼저 탓할 일이다. 이 영화를 위해 김명민은 살을 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뼈를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함께 연기한 하지원의 얼굴이 부어보일 지경이다.
종우(김명민)는 육체가 마비돼 결국 죽게 되는 루게릭병 환자다. 아무도 돌볼 이 없는 그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지수(하지원)를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된다. 장례지도사인 지수는 조금씩 마비가 심해지는 종우를 극진히 간호하지만 몸이 굳으면 굳을수록 종우의 머리와 마음도 경직돼 간다. 온갖 마비환자들이 모인 6인용 병실에서 두 사람은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린다.
'너는 내 운명'에서 비슷한 소재를 다뤘던 박진표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줄거리에는 큰 애착이 없어보인다. 영화 초반 "이거 완전히 '너는 내 운명' 아니냐?"는 김명민의 대사가 등장하는 건 이 영화가 종착점을 향해 가는 길이 어떠할지 미리 고백하는 것으로 들린다. 얼굴 근육까지 전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뺨에 모기가 앉은 장면이 돋보였다. 9년째 식물인간 남편을 간호하는 아내 역을 맡은 남능미가 남편 뺨을 철썩철썩 때리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으로 꼽힐 만하다.
기복이 없다시피 한 줄거리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감독과 이를 극단적으로 성실하게 받쳐준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는 칭찬받을 만하다. 다만 왜 하지원이 그토록 김명민에게 헌신하게 됐는지 이유가 모호하다. 영화가 슬프긴 한데 공감하기는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굵은 눈물 한 방울
역사는 시나리오의 보고(寶庫)이며 모든 예술 창작자들이 한 번쯤 유혹을 느끼는 텍스트다. 명성황후의 마지막에 그를 흠모한 남자가 있었다는 이 영화의 허구적 전제는 그만큼 명성황후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적다는 것의 방증이다. 그것이 명성황후가 소설과 뮤지컬, 영화로 끝없이 창작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종과 혼례를 앞둔 민자영(수애)에게 어느 날 평범한 사공 무명(조승우)이 나타난다. 무명은 한눈에 이 여자에게 반하지만, 민자영은 곧바로 궁궐에 들어간다. 무명은 평생 이 여인을 지켜주리라 결심하고 우여곡절 끝에 명성황후의 호위무사가 되어 궁 안에 들어간다. 그러나 황후는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일본은 그런 황후를 제거하려 한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명성황후와 그를 지켜주고자 하는 사내가 칼과 총을 맞고도 꼿꼿이 서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과연 비장하고 장엄하다. 그녀의 실제 최후와 이 영화를 비교하는 것은 별 의미 없다. 이 영화는 역사에서 소재만 따온 멜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조승우의 촐랑거림 속엔 남성적 매력이 숨어 있고 수애의 앨토 화법은 아름답게 정제돼 있다. '와니와 준하'를 찍었던 김용균 감독은 이들의 첫 만남을 매우 세련된 현대 멜로 드라마로 찍었다. 아름다운 시작이었다. 이후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들어진 나룻배 결투 장면은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한층 높이지만 영화는 이내 무협과 정통 사극, 액션 CG가 와글와글하는 박람회처럼 변한다. 각 장면들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췄으나 한 작품으로 이어붙였을 때 서로 융화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착상의 기본 구조가 매우 흥미로운 이 영화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 총화(總和)에서 색이 바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