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선의 시네마 업데이트] '호우시절'

씁쓸한 기억 대신 두근거리는 사랑의 흔적만 가득…

지난 2001년 '봄날은 간다'부터 '외출'과 '행복'까지 세 편의 허진호 영화 촬영현장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그는 늘 지방을 돌며, 조용하고 맑은 곳에서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그 현장의 공기는 영화마다 조금씩 다르게 담겼다. '봄날은 간다' 이후 4년 만의 '외출'은 그래서 이전의 허진호 영화와 닮았지만 너무 달랐던 영화가 됐고, '행복'은 이전의 허진호 영화와 '엇비슷한' 영화가 됐다. 사랑과 시간의 잔인함을 얘기했던 공통점은 있지만 '봄날은 간다' 이전을 돌이켜보게만 하는 아쉬움도 늘 있었다.

그런데 '호우시절'은 다르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담백함과 전에 없던 따스함이 담뿍 느껴진다.

건설중장비업체 팀장으로 중국에 출장 온 박동하(정우성). 일찍 도착한 탓에 들린 두보초당에서 우연히 가이드를 하고 있던 미국 유학 시절 친구 메이(고원원)를 만난다. 어쩐지 좀 쑥스럽고 반가운 재회. 어색한 영어 대화도 이어진다. 유학시절 사귀었고, 키스도 했고, 자전거도 가르쳐줬다는 동하와 키스는커녕 자전거도 탈줄 모르며 사귄 적조차 없다는 메이. 그렇게 티격태격 웃으며 밥도 먹고 길을 걷는 동안 둘은 가까워진다. 그리고 동하의 귀국일, 공항에 달려온 메이. 동하는 귀국을 하루 늦추고, 둘의 소중한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대단히 운명적인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라 해도, 누구나 가슴에 뭔가 품어 놓은 게 있다. 그게 사람이든, 추억이든, 상처든. 그리고 하루하루 살아나간다. 허진호의 영화가 담아내기 좋아하는 것은, 그리고 그의 영화가 사랑받는 것은 그걸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호우시절'의 동하와 메이도 그렇다. 둘 모두 적당히 자리 잡은, 어쩌면 안간힘을 쓴 끝에 간신히 붙잡은 안정된 삶 속에서 살다가 우연히 잊고 있던 서로를 발견한다. 그럴 때의 사랑이 나머지 인생을 위한 완벽한 반전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순간에 찾아낸 '행복하다'는 느낌은 삶을 한 발짝 앞으로 내딛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건 아직도 밤거리에서 함께 춤을 추고, 상대를 위해 못 먹는 음식도 억지로 먹어보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누군가를 끌어안을 수 있다는, 설렘과 낭만의 힘이기도 하다.

두보의 시 '춘야희우'에서 따왔다는 제목 '호우시절'의 뜻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것처럼 허진호의 영화도 좋은 때를 만난 것 같다. 깨끗한 물에 담갔다 꺼낸 달처럼 반짝이는 고원원과 정우성, 두 배우의 얼굴도 매력적이다. 중국 청두의 투명한 자연까지 담은 '호우시절'은 그렇게 따라하고 싶거나 그리운 사랑의 흔적을 가득 남긴다. 이번엔 씁쓸한 대신 두근거리는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