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유물 하나하나에 강물 같은 사연이 휘돌아 나가고…"

지난 1일 오전 10시30분, 다시 찾은 전시장 안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하다. 엄마 손을 잡은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한 벽면을 독차지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진열장 앞에는 벌써 줄이 길게 늘어섰다.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는 멈춰 서는 진열장마다 아련한 눈빛이 된다. 그는 무슨 추억에 잠긴 걸까. "자네, 저 그림 내력을 아는가? 모사본이 우리 집에 있는데 말이지." 스쳐 지나는 관람자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사롭지가 않다.

전시장 입구에서 처음 손님을 맞는 것은 포도 넝쿨 속에서 노는 아이들이 그려진 표주박 모양의 고려청자다. 꼬마 손님 하나가 엄마 손을 잡고 그저 지나친다. 나는 그만 안타깝다. "아가! 저 청자에 그려진 아이들 모습도 좀 보고 가렴. 귀엽지 않니!" 걸음을 돌려 진열장에 다가선 모자의 표정이 금세 환해진다. "어머나! 예쁘다. 정말 꼬마들이 있네." "화가 이중섭이 일본에 두고 온 아이들이 못 견디게 생각나면, 박물관에 와서 한참씩 보고 갔대요." 내가 짧은 설명을 보태는 사이에 우리는 벌써 뒤이어 온 사람들에게 포위되었다.

살펴보면 국보요, 돌아서면 보물이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건너온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눈물이 날 만큼 기품 있고 아름답다. 지난달 29일 개관 첫날 왔을 때도 돌다 보면 어느새 그 앞에 되 서 있곤 했었다.

지난겨울 미륵사지 발굴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새벽 길을 떠나 익산을 찾았었다. 그러나 유물은 이미 보존처리를 위해 대전으로 옮긴 뒤였다. 아쉬워 미륵산 꼭대기로 올라가 한참을 앉아 있다가 왔다. 그런데 그사이에 보존처리를 마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가 진열장 안에 거짓말처럼 놓여 있지 않은가. 선화공주 아닌 사리봉안기 속에 적힌 사택적덕의 따님인 왕비의 출현으로, 수없는 궁리만 맴돌았던 물건이다. 바로 옆에 사택지적비의 실물이 서 있다. 한 세상을 함께했던 두 사택씨가 전시장 안에서 1400년 만에 해후했다. 참 절묘한 배치다.

지난해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불국사 석가탑에서 수습된 〈묵서지편(墨書紙片)〉도 그새 그 복잡한 퍼즐을 다 맞췄던가, 자랑스레 자태를 드러냈다. 이제 이 연구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겠구나 싶다. 꽃나무 아래 강아지 세 마리가 뛰노는 이암의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앞에 서면 괜히 기분이 좋다. 아래쪽 흰 강아지는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방아깨비 한 마리를 앞발로 꾹 눌러놓고 장난이 한창이다. 〈사계분경도(四季盆景圖)〉 자수병풍도 단연 눈길을 끈다. 우리 문화의 기품을 찾는다면 저런 것이어야지 싶다.

고려청자의 신비한 비췻빛에 매료되다가, 신안해저유물선에서 출토된 원나라 때 〈백자쌍엽문접시〉를 보고는 "저 현대적 감각 좀 봐. 오늘날보다 낫잖아!" 하는 탄성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진다. 고려 때 〈한송사지 석조보살〉 앞에서는 떠난 임을 그리는 〈한송정(寒松亭)〉 시의 슬픈 기다림을 혼자 되뇌어 본다. 저 부처님은 그때 그녀의 눈물을 보았을 것이다.

이번에 새로 찍은 적외선 사진 때문에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놓인 천마총의 〈천마도(天馬圖)〉는 확대사진과 적외선 사진이 실물과 함께 놓였다. 나는 여전히 그림 속 동물이 나정(蘿井) 옆 자주색 알을 지키다가, 박혁거세의 출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길게 울며 하늘로 올라갔다던 그 흰말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인지 적외선 사진 속의 두 뿔이란 것은 귀로 보이고, 가운데 불쑥 솟은 것은 함께 전시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말머리에도 보이는 타래 장식 같다. 그러나 섣부른 단정보다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리라.

문화는 이야기다. 전시장의 유물 하나하나, 갈피갈피에 장강대하와 같은 사연과 원망(願望)들이 휘돌아나간다. 나올 때 보니 〈몽유도원도〉 앞에 늘어선 줄은 그사이에 벌써 몇 바퀴를 돌고 돌아 바깥 계단 아래로 내려서고 있다. 관람객들이 〈몽유도원도〉의 위세에 눌려, 저 기막힌 다른 전시물들을 대충 보아 지나칠까 조바심이 난다. 11월 8일까지 무료로 개관되는 이 전시에서, 나는 아직 나오지 않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이인문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태조 이성계 어진(御眞)〉 등을 보기 위해서라도 두어 번쯤은 더 다녀가게 될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