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선택] 오랜만에 옛 연인을 만났을 때의 떨림

지나고 보면 모든 사랑은 다 아름다웠다. 그땐 정말 두근거렸으며 진심으로 기뻤고 또 홀로 버림받은 듯 애통했다. 그렇기에 사랑은, 결혼이든 이별이든 다음 단계로 이행한 뒤에야 비로소 절실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부터 줄곧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은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

'호우시절(8일 개봉)' 역시 마찬가지다. 그간의 허진호 영화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지만, 섣불리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지나고 보니 아름다웠던 사랑 이야기 한 토막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멜로드라마다. "그래서 둘이 어떻게 됐는데?"라고 묻지 말 것. 그게 뭐 중요한가.

건설회사 직원 동하(정우성)는 중국에 출장 갔다가 우연히 미국 유학시절 여자친구 메이(가오위안위안·高圓圓)를 만난다. 약간 서먹해하던 두 사람은 금세 오래전의 애틋한 마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두 사람의 유학시절 기억이 조금씩 다르다. 동하는 메이와 키스도 했었고 자전거 타기도 가르쳐줬다고 하지만, 메이는 그런 적 없다고 한다. 2박3일 출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공항에서 동하는 충동적으로 하루 더 묵기로 한다. 그리고 나서야 왜 서로의 기억이 다른지 알게 된다.

허진호 감독은 속칭 '연애박사'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단 한 번 순수하고 깊은 사랑을 한 순정파도 아니다. 양쪽 모두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사와 표정과 몸짓은, 그것을 손수 겪었으며 아직도 명징하게 기억하는 자만이 재생해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나 오늘 쉬는 날이야" 같은 자잘한 거짓말은 연애할 때 누구나 한 번쯤 하지만, 새로 기억해 내는 것은 별개의 능력이다. 오랜만에 옛 연인을 마주쳤을 때 두 남녀의 표정은, 포커 첫판에서 투페어쯤을 쥔 그것과 비슷하다. 반가움을 놀라움으로 감추면서도 내심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는 그런 얼굴이다. 두 주연배우는 영화 전반에 걸쳐 퍽 자연스런 연기를 했다(그들도 이런 연애경험이 있는 모양이다).

평범해 보이던 드라마는 영화 후반에서 급류를 타며 빠르게 전개된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시시해지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 영화는 주인공이 사람이냐 귀신이냐 하는 따위는 아니다. 이윽고 영화는 깊고 고요해지며 끝난다.

영화를 보고 중국 청두(成都)에 가고 싶어진다면, 대나무 숲의 초록색 때문일 것이다. 조연 김상호의 연기가 적절하게 긴장을 헐어내며 관객의 숨통을 틔운다.

▶전문가 별점

―지나간 것을 다시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고 괴롭다는 것을, 좋은 시절은 언제나 기억임을 보여주는 허진호표 감성. 이상용·영화평론가 ★★★★

―참 원숙하고 섬세하지만 유난히 심심한 허진호식 순수 로맨스. 황희연·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