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식의 시네마 오디세이] '호우시절', 밝아진 '허진호표 멜로'
입력 : 2009.10.11 17:18
릴케는 묻는다.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햇빛처럼 꽃보라처럼/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시인은 사랑이 왔을 때의 느낌이 궁금하다. 허진호의 질문은 결이 조금 다르다. 그는 사랑의 때에 관심이 있다. 사랑이 이뤄지는데 알맞은 때가 있는가. 시인 두보가 대신 대답한다.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ㆍ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알맞은 때에 내리는 비가 좋은 비인 것처럼, 좋은 사랑은 알맞은 때를 안다. 모든 사랑에는 때가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호우시절'(감독 허진호)에서는 자주 비가 내린다. 봄날, 때를 맞춰 내리는 비다. 죽은 대지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지나간 사랑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비다. 오래 전 헤어졌던 서툰 연인들의 재회와 맞닿아 있다.
건설회사 직원 동하(정우성)는 중국 청두로 출장을 떠난다. 시차 때문에 시계를 1시간 뒤로 돌려놓는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동하는 청두에서 미국 유학시절 친구 메이(고원원)를 우연히 만난다. 그 해후의 표정은 복잡하다. 반갑기도 하고, 서먹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동하와 메이는 띄엄띄엄 근황을 묻고, 어색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한때 어설픈 연인이었다. 그래서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세월의 공백 탓이다.
사실은, 10여년 전에도 그랬다. 스무 살 무렵의 순수한 영혼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들은 사랑에 서툴렀다.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몇 가지 오해와 주저 때문에 미완성으로 끝났다. 이제 둘의 기억은 자주 엇갈린다. 자기가 사랑했다고 말한 기억만은 확실하다. 그 시절은 '사랑의 때'가 아니었다.
영화는 동하와 메이가 두보초당 대나무숲을 거닐고, 중국 음식을 먹고, 거리에서 춤을 추며 애틋한 마음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백하게 그린다. 그들의 3박4일 짧은 데이트는 연초록 댓잎처럼 싱그럽다. 여느 연인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쉽게 다가서지는 못한다. 옛 사랑의 어색함이 남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메이에게는 쓰촨성에서 겪은 개인적인 아픔이 또 있다.
'호우시절'은 허진호의 다섯 번째 영화다. 앞선 네 편 모두 멜로영화였다. 그의 멜로영화는 '허진호 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독특하고 고유한 색깔을 갖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여운이 깊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사랑의 섬세한 결과 무늬를 과감한 생략과 은유로 전달해 호평받았다.
허진호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상처를 안고 있다.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은 시한부 삶을 살았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던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물풀처럼 부유하는 사랑에 상처받았다. '행복'의 은희는 중증 폐질환 환자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두 사람에게는 젊은 날의 서툰 첫사랑이 상처다. 메이에게는 천재지변의 상흔까지 남아 있다.
'호우시절'은 그러나 심각하지 않다. 예전 작품들보다 날렵하고 경쾌하다. 정우성, 고원원의 밝은 연기와 이미지가 한몫한다. 두 배우는 청두에서 우연히 재회했을 때, 어색한 듯 반가운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두보초당의 푸르른 대숲과 활기찬 청두 거리, 배우들의 해맑은 미소 역시 영화를 밝게 이끌어간다.
이런 변화는 양날의 칼이다. 경쾌하고 세련된 영상은 멜로영화로서 분명 장점이다. 대신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조명하는 데는 한계를 노출한다. 동하와 메이의 감정 변화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게 공감과 여운을 남기지는 않는다. 서사 전개가 단선적이고, 스케치하듯 감각적으로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이런 아쉬움은 사실 과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허진호의 신작이라는 기대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호우시절'은 허진호의 팬에게는 새로운 연출을 지켜보는 재미를 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옛사랑이 된 첫사랑을 만난 청춘남녀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지켜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대신 앞선 작품들의 감흥은 잊는 편이 좋을 듯하다.
제목 '호우시절'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따왔다. 제목에 감독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모든 사랑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지사장 역의 김상호는 조연배우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켜가며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연기를 보여준다.
< 기획취재팀ㆍdada@sportschosun.com>
그래서일 것이다. '호우시절'(감독 허진호)에서는 자주 비가 내린다. 봄날, 때를 맞춰 내리는 비다. 죽은 대지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지나간 사랑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비다. 오래 전 헤어졌던 서툰 연인들의 재회와 맞닿아 있다.
건설회사 직원 동하(정우성)는 중국 청두로 출장을 떠난다. 시차 때문에 시계를 1시간 뒤로 돌려놓는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동하는 청두에서 미국 유학시절 친구 메이(고원원)를 우연히 만난다. 그 해후의 표정은 복잡하다. 반갑기도 하고, 서먹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동하와 메이는 띄엄띄엄 근황을 묻고, 어색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한때 어설픈 연인이었다. 그래서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세월의 공백 탓이다.
사실은, 10여년 전에도 그랬다. 스무 살 무렵의 순수한 영혼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들은 사랑에 서툴렀다.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몇 가지 오해와 주저 때문에 미완성으로 끝났다. 이제 둘의 기억은 자주 엇갈린다. 자기가 사랑했다고 말한 기억만은 확실하다. 그 시절은 '사랑의 때'가 아니었다.
영화는 동하와 메이가 두보초당 대나무숲을 거닐고, 중국 음식을 먹고, 거리에서 춤을 추며 애틋한 마음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백하게 그린다. 그들의 3박4일 짧은 데이트는 연초록 댓잎처럼 싱그럽다. 여느 연인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쉽게 다가서지는 못한다. 옛 사랑의 어색함이 남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메이에게는 쓰촨성에서 겪은 개인적인 아픔이 또 있다.
'호우시절'은 허진호의 다섯 번째 영화다. 앞선 네 편 모두 멜로영화였다. 그의 멜로영화는 '허진호 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독특하고 고유한 색깔을 갖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여운이 깊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사랑의 섬세한 결과 무늬를 과감한 생략과 은유로 전달해 호평받았다.
허진호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상처를 안고 있다.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은 시한부 삶을 살았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던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물풀처럼 부유하는 사랑에 상처받았다. '행복'의 은희는 중증 폐질환 환자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두 사람에게는 젊은 날의 서툰 첫사랑이 상처다. 메이에게는 천재지변의 상흔까지 남아 있다.
'호우시절'은 그러나 심각하지 않다. 예전 작품들보다 날렵하고 경쾌하다. 정우성, 고원원의 밝은 연기와 이미지가 한몫한다. 두 배우는 청두에서 우연히 재회했을 때, 어색한 듯 반가운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두보초당의 푸르른 대숲과 활기찬 청두 거리, 배우들의 해맑은 미소 역시 영화를 밝게 이끌어간다.
이런 변화는 양날의 칼이다. 경쾌하고 세련된 영상은 멜로영화로서 분명 장점이다. 대신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조명하는 데는 한계를 노출한다. 동하와 메이의 감정 변화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게 공감과 여운을 남기지는 않는다. 서사 전개가 단선적이고, 스케치하듯 감각적으로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이런 아쉬움은 사실 과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허진호의 신작이라는 기대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호우시절'은 허진호의 팬에게는 새로운 연출을 지켜보는 재미를 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옛사랑이 된 첫사랑을 만난 청춘남녀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지켜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대신 앞선 작품들의 감흥은 잊는 편이 좋을 듯하다.
제목 '호우시절'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따왔다. 제목에 감독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모든 사랑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지사장 역의 김상호는 조연배우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켜가며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연기를 보여준다.
< 기획취재팀ㆍ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