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고객은 '주거래 은행'에 충성했지만 은행은 '외면'했다

'재테크에 성공하려면 주거래 은행부터 만들어라.'

시중은행 창구 직원의 안내나 재테크 전문서적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다. 한 은행을 정해 예금·대출·카드·급여이체·공과금 납부 등 모든 금융거래를 집중시키면 그 은행의 주거래 고객이 돼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은행에 더 좋은 금리 조건의 예·적금 상품이 나와도 주거래 은행에 머물러 있거나, 주거래 은행 계열사의 신용카드를 집중해서 쓰는 사람들도 많다.

주거래은행 제도는 고객들이 금융거래에서 이것저것 따져야 하는 시간적·정신적 낭비를 줄여주는 좋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편단심 재테크'에 대한 은행들의 보답이 적정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많다. 먼저 주거래은행 제도의 혜택을 받는 주거래 고객으로 선정되기가 쉽지 않다. 또 은행들이 3개월마다 은행에 준 이익을 재평가해 주거래 고객을 다시 선정하는 바람에, 한 은행을 오랫동안 믿고 거래한 '소액 단골'이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주거래 고객은 수수료 등 면제받아

시중은행들은 고객이 은행 실적에 기여한 정도를 점수화해 수수료 면제 등 각종 혜택을 주는 '주거래 고객 등급제'를 운영하고 있다. 보통 1년에 4차례 주거래 고객을 선정하거나 등급을 갱신하며, 선정·갱신일로부터 향후 6개월간 혜택을 준다. 등급 선정 시 점수화되는 항목은 예금·적금·대출·카드 사용의 실적, 환전 실적, 공과금 자동이체, 급여이체 등이다. 지난 3개월간 거래실적만 반영된다.

신한은행의 경우 '탑스 클럽(Tops Club)' 제도를 통해 주거래 고객을 '프리미어' '에이스' '베스트' '클래식' 등 4단계로 분류한다. 국민은행은 4단계,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은 각각 5단계의 고객 등급제를 운영 중이다.

주거래 고객의 가장 큰 혜택은 수수료 면제다. 4대 시중은행의 최상 등급 주거래 고객은 영업시간 외 ATM(현금입출금기) 수수료, 타행 이체 수수료, 자기앞수표 발행 수수료 등 거의 모든 은행 수수료를 면제받는다. 계열사도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준다. 신한금융그룹은 신한금융투자(증권), 신한생명(보험), 신한카드(카드사) 등에서 은행과 동일한 수준의 수수료 면제 또는 연회비 면제 혜택을 준다. 우리은행·하나은행도 우리투자증권·하나대투증권 등 계열 증권사에서 각종 수수료를 면제해 준다. 여기에 외화 환전 수수료가 30~50% 감면되며, 은행 VIP창구를 통한 상담, 전용 핫라인(hot-line) 전화 상담 등 주거래 고객을 위한 특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가족거래 실적 합하는 것이 유리

김인응 우리은행 PB사업단 부부장은 "주거래 은행을 만들면 안정된 상담 창구를 확보해 금융 생활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똑같은 금융자산을 들고도 보다 쉽게 주거래 고객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소개했다.

먼저 ①한 은행의 여러 금융상품에 분산하는 방식으로 주거래 고객 선정용 점수를 높이고 ②증권·보험사 등 은행의 다른 계열사를 활용하며 ③가족들의 거래 실적을 합산하는 방법이다.

국민은행은 요구불예금, 정기예금, 정기적금, 일반대출, 주택담보대출 등 10개 항목에 각각 25점씩 최대 250점을 준다. 신한은행은 계열사 한 곳에서 주거래 고객으로 등록되면 전체 계열사에 대해 그 등급을 인정해 준다. 일례로 신한카드로 1년에 1800만원을 사용해 '베스트' 고객이 되면, 신한은행·신한금융투자에서 신규 고객이어도 '베스트' 등급에 상응하는 혜택을 준다. 우리은행과 하나은행도 계열사 거래 실적을 등급 산정에 반영한다. 주민등록등본 등 서류를 들고 은행 창구를 방문해 "가족 거래실적을 합산해 주거래 등급에 반영해 달라"고 하면 보다 높은 등급의 주거래 고객이 될 수도 있다.

◆주거래 고객 제도의 함정

그러나 주거래 고객에는 '함정'도 많다. 먼저 높은 등급의 주거래 고객으로 선정되어 큰 혜택을 받기가 쉽지 않다.

신한은행의 경우 최상위 '프리미어' 등급이 되기 위해선 2000점 이상의 '탑스 점수'를 쌓아야 한다. 입출식예금만으로 최상위 고객이 되는 경우를 가정하면, 3개월간 6670만원을 고스란히 넣어 둬야 한다는 것이다. 여·수신(예금·대출 등) 거래자산 총액을 기준으로 등급을 산정하는 우리은행의 경우 최하위 등급이라도 받으려면 거래 자산이 1000만원 이상 되어야 한다.

주거래 고객이라도 등급이 낮으면 수수료 면제 등 혜택이 크게 줄어든다. 하나은행의 최상위 등급인 '하나VIP'(하나 점수 1만점 이상) 고객은 ATM·타행송금·폰뱅킹 등 수수료가 모두 면제되지만, 초보 등급인 '그린'(200점 미만)은 인터넷뱅킹(면제)·ATM(50% 감면)을 제외하면 혜택이 적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통 '주거래 은행=오래 거래한 은행'이다. 그러나 거래 기간은 큰 도움이 안 된다. 장기 거래 고객에 대한 혜택이 비교적 많은 국민은행도 거래기간 1년당 10점씩 계산해 최대 300점(30년)만 준다. 30년 주거래 고객과, 최근 3개월간 입출식 예금에 300만원을 넣어둔 신규고객이 받는 점수가 같다. 주택담보대출 2억~3억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 은행의 최상 등급 주거래 고객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은행에 많은 수익을 안겨주는 대출 실적이 등급 산정 시 주요 항목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만약 고객이 주택담보대출을 갚으면 그는 주거래 고객에서 제외된다.

주거래 고객에 대한 혜택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시중 A은행 주거래 제도 담당자는 "최근 은행들은 주거래 등급에 따라 일괄적으로 예금금리·대출금리를 우대해 주기보다는, 금융상품의 개별 조건에 따라 우대금리를 제공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주거래 등급과 별도로 '급여이체 건당 0.1%포인트' '신용카드 신규발급시 0.2%포인트' 식으로 개별 거래 실적과 예금·대출 상품별로 우대금리를 적용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