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선의 시네마 업데이트]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우아하고 감미로운 세계. 트란 안 홍의 영화는 늘 그랬다. '그린파파야 향기'도 '시클로'도. 영화에 담긴 현실은 언제나 남루하고 고단한 참혹한 순간들이 넘쳐날지라도 그걸 바라보는 시선은 꿈을 꾸는 마음, 그 자체였다. 그 꿈은 눈물이 날 만큼 아련하기도 하고(그린 파파야 향기), 때론 자꾸 반복되지만 헤어 나올 수 없는 악몽(시클로)이 되기도 한다. 그 꿈은 놀랄 만큼 선명하고 섬세해서 마치 현실 같기도 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 것이다.

무척이나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 본 트란 안 홍의 신작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이하 '비와 함께') 역시 우리 인생의 악몽 속을 통과한다.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달려가지만 자꾸만 생각나는 꿈. 중독되는 꿈. 누군가와는 나눌 수 없는, 고통스럽게 혼자 끌어안고 가야하는 꿈이다. 18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스타들을 캐스팅해, LA, 홍콩 등을 돌며 촬영한 거국적인 영화가 됐더라도, 그래서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겉모습은 액션스릴러처럼 보이지만 '비와 함께'는 그렇게 짙푸른 꿈속을 걷는다.

한때 연쇄살인마를 쫓았던 전직 형사 클라인(조쉬 하트넷)은 어느 날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 사장으로부터 실종된 아들 시타오(기무라 타쿠야)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시타오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 필리핀을 거쳐 홍콩까지 간 클라인은 형사 시절 치구였던 조 맹지(여문락)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침 조 맹지는 홍콩 암흑가 거물 수동포(이병헌)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얼마 후 수동포의 연인 릴리(트란 누 옌케)가 갑자기 실종된다. 분노와 격정에 휩싸인 수동포가 추적 끝에 발견한 건 릴리와 함께 있는 시타오다.

클라인이나 시타오, 암흑가 보스 수동포, 심지어 그의 애인 릴리까지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연쇄살인마를 잡으려고 연쇄살인마처럼 생각하다가 그에게 중독돼버린 클라인에겐 늘 살인의 악몽이 따라다닌다.

암흑가 보스 수동포는 산사람에게 망치질을 해 그 피에 미끄러질 정도로 잔혹하지만, 무표정한 얼굴 속에 떨리는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 릴리는 마약중독이며 그 세상에서 빠져나오려면 극한의 고통이 수반된다. 그녀를 구원해준 신비한 남자 시타오는 세상 사람들의 모든 상처와 고통을 자기 몸으로 받아주는 기적의 능력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쳐야 한다.

그들 모두 끊임없이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찾아 헤매며 살아가는 인생. 그 악몽을 지켜보고, 그 악몽 속을 걷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슬프고, 외롭고, 지친다. 하지만 불쾌하진 않다. 어차피 우리 모두 그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