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둑계에 '공중증(恐中症·중국을 두려워하는 증세)' 쓰나미

중국에서 '공한증(恐韓症)'이란 말은 축구 팬들뿐 아니라 바둑인들도 즐겨(?) 사용하던 전용어였다. 2003년 8월부터 약 3년간 한국이 국제대회 23연속 우승을 질주할 정도였으니 중국 바둑인들의 아쉬움을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예전 같지 않다. 지난주 추려낸 제14회 삼성화재배 4강엔 중국기사들이 세 자리를 점했다. 이창호가 중국 신예 저우루이양(周睿羊)에게 극적 반 집 역전승을 거두지 못했더라면 한국은 전멸할 뻔했다. 다음 달 벌어질 LG배 8강도 중국 5, 한국 3명이 대기 중이다. 이런 상황이 지난해부터 부쩍 잦아지고 있다.

양적(量的)으로만 밀리는 게 아니다. 현재 세계타이틀 중국 5개, 한국 3개에서 보듯 질적으로도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했다. 한국바둑이 90년대 중반 이후 10년 넘게 세계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스타를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이세돌이 번갈아가며 '최강 한국'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현재는 구리(古力)가 LG배 도요타배 비씨카드배 등 3관왕으로 군림, 부동의 1인자로 나섰다.

한때 세계 4관왕으로 활약하던 이세돌은 지난 7월 휴직선언과 함께 장외(場外)로 사라졌다. 아직 그의 소유로 돼 있는 삼성화재배 주인도 올해 안에 바뀌게 된다. 이창호는 2006년 초 이후 총 9회 세계 결승에 나갔으나 마이너기전 1회를 제외한 8번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한국바둑은 현재 '리더 부재(不在)'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장(大將)'급을 떠받칠 '부장(副將)'급이다. 최철한(잉씨배) 강동윤(후지쓰배)이 현역 세계챔피언이지만 아직 안정감이 부족하다. 이번 삼성배 16강전서 최철한은 중국 천야오예(陳耀燁)에게 완패했고, 강동윤은 첫 관문서 막혀버렸다. 박영훈 조한승 등도 정상 정복까지는 뭔가 힘이 부친 모습이다. 안방에서 펄펄 나는 김지석 김승재는 국제대회만 나가면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은 창하오(常昊)가 이창호를 따돌리고 춘란배를 쟁취, 구리의 '백업 요원' 역을 충실히 이행했다. 추쥔(邱峻) 쿵제(孔杰)는 현재 LG배 8강, 삼성화재배 4강에 모두 생존해 있다. 박문요 후야오위(胡耀宇) 등의 행군속도 역시 허영호 원성진 윤준상 이영구 등 '동급' 한국기사들을 앞선다.

19일 현재 올해 한·중 양국 간 맞대결 성적을 들춰보면 충격적이다. 총 372국을 겨뤄 한국은 128승, 34.4%의 승률을 기록했다. 중국(244승·승률 65.6%)과는 거의 1대2의 비율이다. 한국주최 기전 통합예선에서 중국은 정예를, 한국은 모든 기사를 내보내 싸운 전적이 다수 포함된 전적이어서 이 자료가 양국 간 실력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본선 이상에서의 맞대결 성적마저 한국의 44승 65패(승률 40.4%)로 나타난 것은 한국 열세의 명백한 '증거'다.

중국바둑의 빠른 성장 비결은 ▲갈수록 높아지는 바둑열기 ▲인구 14억의 풍부한 인적자산 ▲정부 지원과 사회주의식 집체훈련 ▲어린 소년들의 조기입단 유도정책 등으로 요약된다. 다른 건 몰라도 조기 입단, 연구모임 지원 등 한국기원이 정책 차원에서 손댈 수 있는 부분은 적극 나서야 할 시점에 왔다는 소리가 높다.

최규병 九단도 "중국 정상권 층이 엄청 두꺼워져 한국이 기존스타 3~4명만으로 대적하기엔 너무 벅찬 상황"이라며 "유망주 발굴과 육성방안을 서둘러 세우고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이대로 저물기엔 지난 10여 년간의 영광이 너무도 찬란했던 한국바둑계에 갑자기 공중증(恐中症)이 쓰나미처럼 덮쳐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