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 은모(서우)가 묻는다. "이게 저한테 할 수 있는 모든 얘기예요? 난 꼭 진실을 알아야겠어요." 형부 중식(이선균)이 대답한다. "다 진실이야, 다." 그러나 형부의 대답은 거짓말이다. 진실을 은폐하는 그 거짓말은 너무 착해서 마음에 아픈 파문을 남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해서는 안되는 형부와 처제의 안타까운 마음은 세월을 따라 안개처럼 흔들린다.
'파주'(감독 박찬옥)는 안개의 영화다. 안개로 시작해서 안개로 닫힌다. 안개의 농도는 다르다. 처음엔 자욱하고, 마지막엔 옅어진다. 두 남녀의 내면의 변화를, 사랑의 표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된다. '파주'는 금지된 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그 사랑의 위험한 몸짓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안개처럼 흐릿하고 불투명한 두 남녀의 감정의 결과 흐름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파주'는 불친절하다. 스토리는 단순한 편인데, 플롯은 복잡하다. 그래서 불편하다. 중식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배자가 돼 파주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은모의 언니를 만나 결혼한다. 은모는 중식에게 연정을 느낀다. 그러다가 언니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은모는 인도로 떠난다. 그 사이 중식은 철거대책위원장이 되어 용역 깡패들과 싸우고, 은모는 3년만에 돌아와 언니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친다. 이때 은모가 요구한 진실은 두 가지다. 중식의 감정과 언니 죽음의 진짜 이유다. 은모는 한 가지 진실만 알게 된다.
영화는 이 스토리를 파편화시켜 보여준다. 전개가 단선적이지 않은 이유는, 시간이 자주 교차되기 때문이다. 현재와 과거, 더 먼 과거가 수시로 엎치락뒤치락 뒤엉킨다. 은모가 귀국하는 2003년에 이야기가 시작돼 8년전, 3년전 사건들이 순서를 바꿔 등장한다.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이러한 전개는 묘한 양면성을 갖는다. 우선 관객들은 스토리를 짜맞추는데 애를 먹는다. 반대로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오히려 집중도를 높인다. 중식과 은모의 감정이 초반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도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시간이 뒤섞이면서 발생한 혼란은 중식과 은모의 내면으로 치환된다. 영화의 형식이 내용을 넌지시 암시하는 셈이다. 대단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줄곧 긴장을 유지하는 이유다. 중식과 은모의 감정은 줄곧 안개에 싸여 있다. 실체는 좀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은모의 감정 묘사가 훨씬 세밀하고, 그녀의 내밀한 사랑의 느낌이 더 친절하게 설명된다. 여성 감독이어서 여성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익숙한 탓인지도 모른다. 아귀가 헐거운 일부 장면도 눈에 띄지만,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은모는 자주 눈물을 보인다. 뺨으로 흘러내리지 않는,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이다. 중식과 은모의 사랑은 서우의 그 눈물을 닮았다. 감출 수도 없고, 시원스레 울어버려 쏟아낼 수도 없다. 그 복잡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신인급 배우인 서우는 매우 탁월하게 표현한다. '미쓰 홍당무'에서 될성 부른 떡잎으로 평가받았던 서우는 '파주'에서 그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킨다. 이선균도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는 눈빛과 표정으로 중식의 감정을 잘 그려낸다. 흩어진 이야기를 산만하지 않게 조립한 연출력과 주연 배우들의 호연이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파주'는 올해의 수작 중 한 편으로 기억될 만하다.
안개는 감춤의 미학을 상징하는 매개체다. 안개 자욱한 '파주'는 드러내지 않고 감춤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형부와 처제의 사랑은, 중식의 고백을 통해서 비로소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 아픈 사랑을 감독은 담백하게 전한다. 그래서일 게다. 거친 듯 세심한 연출로 빚어낸 금지된 사랑의 안타까움은, 안개 속으로 번지는 종소리처럼 아련하고 애잔하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에 여백의 미가 흐트러진 점은 아쉽다. 중식이 언니의 죽음의 진실을 끝까지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사족으로 느껴진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재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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