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바둑의 사활이 걸린 승부가 다가오고 있다. 14회 째를 맞는 LG배 세계기왕전이다. 9일 준준결승, 11일 준결승을 앞두고 대국자들이 속속 제주에 도착하면서 제주도 남단 아름다운 포구 성산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8일 오후 현재 한국 선수 3명과 중국대표 5명 등 출전자 8명 전원이 집결, 9일 벌어질 결전을 앞두고 컨디션을 조절 중이다. 대국은 9일 오전 10시 이곳 휘닉스 아일랜드 리조트에서 시작된다.
이창호(34) 9단은 다른 기사들보다 하루 늦은 8일 오후 5시 쯤 도착했다. 5일 삼성화재배 준결승 대 추쥔(邱峻·27) 전서 패하고 귀국한 뒤 7일 한국 바둑리그 윤준상과의 대국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바둑서도 패했다. LG배가 끝나면 곧장 상경, 13일 국수전 대국도 소화해야 한다. 일정이 몰린 이창호는 다소 피곤한 표정이었으나 특유의 미소를 띤 채 말 없이 체크인을 마쳤다.
최철한(24) 9단과 박영훈(24) 9단은 7일 현지 도착 후 밝은 표정으로 결전에 대비하고 있다. 절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인 두 동갑내기 기사는 현지 도착 후에도 관광지인 섭지코지 산책을 함께 나서는 등 하루 종일 붙어다니는 모습이었다. 중국 기사 5명은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한국 팀 1진보다 5시간 가량 늦은 7일 밤 10시 경 숙소에 들었다.
지난 주 벌어졌던 제14회 삼성화재배 준결승서 한국기사론 유일하게 남아있던 이창호 9단마저 탈락하면서 한국 바둑계는 심각한 위기감에 빠져있다. 사상 첫 중국기사끼리의 결승카드가 만들어짐으로써 삼성화재배 패권이 자동으로 중국에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LG배(구리) 비씨카드배(구리) 도요타덴소배(구리) 춘란배(창하오) TV아시아선수권(쿵제)을 포함해 중국의 보유타이틀 수는 사실상 6개가 됐다. 잉씨배(최철한) 과 후지쓰배(강동윤) 2개뿐인 한국을 압도하는 숫자다.
이창호는 공교롭게도 이번 LG배 8강전서 추쥔과 다시 대결한다. 나흘 만의 설욕전이다. 그 승리 후 추쥔은 지금 중국바둑계의 영웅이 됐다. 중국 바둑사이트 도처에 한국 거함 이창호를 눕힌 전과를 칭송하는 댓글이 줄을 잇고 있다. 중국 랭킹 7위인 그는 이창호와의 역대전적도 2승 2패 동률로 만들며 팽팽한 접전을 예고하고 있다.
요즘의 기세만 놓고 보자면 최철한이 가장 돋보인다. 최근 발표된 11월 랭킹에서 무려 46개월만에 톱 랭커로 복귀한 그는 이번 LG배서도 순항해 연간 통산상금 개인 최다기록을 경신하겠다는 태세다. 이미 지난 봄 우승상금 40만달러 짜리 잉씨배와 국내 기전 맥심배를 제패했다. 다음 주말엔 우승상금 1억 5000만원짜리 ‘바투‘ 결승전도 앞두고 있다.
최철한의 파트너 쿵제(孔杰·27) 9단은 올들어 13회 삼성화재배 준우승, TV아시아선수권 우승 등 상승세를 타더니 지난 주 14회 삼성화재배 준결승서는 세계 3관왕 구리를 2대0으로 일축하는 등 기세등등하다. 최철한은 중국 2위 쿵제와의 역대전적에서 1승 2패로 한 판 뒤져있다가 지난 9월 중국리그(비공식)서 승리, 균형을 맞췄다. 가장 최근 대결서 이겼다는 지적에 최철한은 “중국리그는 느낌이 다르다”며 겸손해 했으나 표정은 자신감이 넘쳤다.
박영훈(24) 9단은 후지쓰배 두 차례 우승 등 3번이나 세계 정상을 정복해 본 배테랑. 계산력과 끝내기 솜씨가 세계 1인자로 공인될 만큼 안정된 바둑을 구사한다. 문제는 직전 대국 4연패로 약간의 이상 기류를 보이고 있다는 점. 그러나 느긋한 배짱으로 유명한 박영훈 본인은 “전혀 이상한 곳이 없다”며 여유를 과시하고 있다. 박영훈은 지난 해에도 LG배 4강 고지를 밟았었다.
박영훈이 만날 상대인 중국 5위 후야오위(胡耀宇·27) 8단은 2007년 제11회 LG배서 준우승하는 등 만만치 않은 솜씨의 보유자. 끈끈하고 후반에 강하다는 점에서 기풍도 박영훈과 같은 과로 분류된다. 둘 간 통산 전적에선 후야오위가 2승 1패로 앞서있다.
이밖에 전년도 LG배 챔피언이면서 세계 3관왕이기도 한 중국 1인자 구리는 8강전서 퍄오원야오(朴文堯·21) 5단과 마주 앉는다. 조선족 기사로 자국 6위에 올라있는 퍄오는 중국 최고 유망주 중 하나로 꼽힌다. 퍄오로선 구리에게 지난 해 말 중국 명인전 결승전 2연승 후 3연패, 올해 초 도요타덴소배 결승전 0대2 패배 등 잇단 아쉬움을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우승상금 2억 5000만원이 걸린 LG배는 ?가장 많은 나라가 우승해 본 기전(4개국) ?특정 기사에게 2연속 우승을 허용하지 않는 전통 ?연례 국제바둑대회 중 최대 규모(예산 12억 5000만 원)으로 유명하다. 동료들의 훈수를 막기 위해 점심시간 감독관제를 실시하는 것도 이 대회만의 특징이다. 8강전 대국은 7일 오전 10시 정각 시작되며 4강 대진은 새로 추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