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선의 시네마 업데이트] '백야행'

빛과 그림자로 살아온 남녀와 살인사건의 진실… 아쉬운 연출력 메우는 원작의 힘

2~3년 전, 충무로에선 일본소설을 영화화하려는 한국영화 제작사들의 판권 구매 경쟁이 치열했다. 그 중 '비밀' '용의자 X의 헌신' 등 여러 편이 영화화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미스터리한 구성에 담긴 치밀한 러브 스토리 때문에 더 영화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의 소설 '백야행'을 스크린에 옮긴 한국영화 '백야행'(감독 박신우)을 봐선, 꼭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듯하다.

한 남자가 살해당한다. 이 사건이 14년 전 발생했던 다른 살인사건과 관련 있다 여긴 담당형사는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형사 동수(한석규)를 찾아간다. 동수는 이 일에 14년 전 살해당한 피해자의 아들 요한(고수 분)이 연관됐음을 감지한다. 한편, 재벌총수 승조의 비서실장 시영(이민정)은 그의 약혼녀 미호(손예진)를 뒷조사중이다.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하면서 디자이너로 데뷔하려는 미호는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여자. 어느 날 요한과 미호를 쫓고 있던 동수와 시영이 우연히 만나고, 그들이 쫓던 두 남녀가 14년 전 발생했던 살인사건에 얽힌 아이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미호의 엄마가 요한의 아빠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14년 전의 살인사건. 그 이후 미호는 가장 화려해 보이는 삶을, 요한은 가장 어두운 삶을 살고 있다. 미호의 베드 신과 요한의 살인 장면이 교차되는 영화의 시작부터 거의 모든 연출이 이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둘 모두 밝은 태양 아래서 걸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원작에 담긴 깊은 절망을 스크린으로 옮겨놓진 못한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비중이 작던 형사 캐릭터를 대폭 키워내 미호와 요한 사이의 관계를 풀이하려 했던 데서 오히려 원작의 정수와 영화의 색깔은 흐릿해진다. 14년 전과 현재를 오가는 도입부도 두서없이 나열된다. 초반부의 설정에 익숙해지더라도 중반 이후부터는 캐릭터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둘의 과거를 알게 돼도, 미호는 천성이 악한 여자로, 요한은 무뚝뚝하고 답답한 캐릭터로 보일 뿐이다.

'백야행'의 하얀 어둠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하얀 색이 아니라 뿌옇고 불투명한 하얀 색이다.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던 상처와 죄의식, 사랑의 복합적인 느낌이 담긴 그 하얀 빛을 영화에선 단순히 어둠과 대비되는 밝음으로만 사용한다. 14년간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미호와 요한이 사실상 늘 함께 해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마주 보는 카페나 아파트를 설정한 아이디어는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들이다. 자신을 둘러싼 장애물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했던 미호의 절박함과 그녀에게 요한이 바치는 헌신의 밑바닥에 깔린 깊은 절망은 분노와 두려움 정도로만 표현된다. 손예진 고수 한석규 등 배우들의 연기에도 새로울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흥미롭게 느껴진다면, 그건 역시 원작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