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채우고 비워낸 단 하나의 색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인 정상화(77) 화백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정상화 화백의 작품은 모두 〈무제〉로 이름 붙이고, 뒤에 작품을 완성한 날짜를 붙여 구별한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언뜻 보기에 모노크롬(단색조) 회화처럼 캔버스에 한 가지 색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정상화의 색들은 모노크롬과 달리 그만의 세계를 보여준다.

정상화 화백은 1956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1969년부터 7년간 일본에서, 1977년에서 15년간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가 해외에서 활동한 기간은 세계적으로 미술의 여러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던 시기다. 국내에서도 모노크롬 등이 활발하게 전개됐지만 정상화는 여기에 합류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왔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과정을 '비워내기'와 '채워 넣기'라고 말한다. 캔버스 위에 색을 칠한 뒤, 색이 마르면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네모들로 떼어낸 뒤 물감으로 다시 채워 넣는다. 색을 채우고 비워내고 다시 채우면서 작품의 순도(純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단순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매일 내쉬는 숨이 같지 않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진행되듯 캔버스 안에서 여러 층위를 보여준다. 캔버스라는 평면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도전이기도 하다.

작가는 파랑을 비롯해 빨강과 하양, 검정을 중심으로 관람객에게 대화를 건네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파랑이다. 바다가 보이는 경북 영덕에서 자란 작가는 청색 작품을 통해 다채로운 언어를 구사한다. 〈무제 08-06-12〉는 에너지와 역동성이 느껴지는 청색이 화면 가득히 존재한다. 잔잔한 수면 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무제 07-02-05〉는 인생의 출렁거림을 관조하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빨강의 〈무제 09-07-24〉는 앳된 누이가 검은 머리에 맨 댕기 속 빨강 같은 아련함을 주고 있다.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서럽기까지 하다. 고향집에 빨갛게 익어가는 탐스러운 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빨강의 현란한 변주(變奏)를 즐길 수 있다. 베이지 빛 도는 백색의 〈무제 09-07-05〉에서는 오랜만에 꺼내보는 어릴 적 배냇저고리 냄새가 나는 듯하다. 우리 민족만이 민감하게 알아볼 수 있는 고유한 백색이다.

캔버스 앞에 서면 살아온 인생만큼 다양한 추억과 상상으로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열린다. (02)734-6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