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 페이퍼진] 시네마 오디세이 : 백야행
입력 : 2009.11.30 09:33
| 지독한 상처…흔들리는 걸음 |
백야(白夜). 하얀 밤, 하얀 어둠. 밤이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빛이 어둠 속에 남아있는 것인가, 어둠이 빛 속에 스며있는 것인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간. 그 모순의 입자들.
'백야행'(감독 박신우)은 제목이 많은 것을 암시한다. '하얀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 얘기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빛과 어둠의 삼투압 혹은 충돌이 일어난다. 슬프고 가혹하다. 무엇보다 지독하다. 지독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과거를 파헤치는 '슬픔의 노래'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애잔하게 흐르면서 그 슬픔을 흔들어 깨운다. 그러나 밤에 잠을 못 자면, 정신이 혼미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하얀 어둠'처럼 모호하기도 하다.
미호(손예진)는 빛의 세계다. 겉으로만 그렇다. 요한(고수)은 완벽한 어둠의 세계다. 미호는 재벌총수의 약혼녀다. 요한은 카페 종업원이면서 미호의 그림자다. 미호의 주문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다.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상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4년 전, 인천 앞바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버려진 폐선에서 요한의 아버지가 살해됐다. 그런데 수사는 미궁에 빠진다. 석연찮은 점 투성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형사 동수(한석규)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다가 실패한다. 거의 폐인이 된다.
'백야행'은 두 개의 트랙으로 굴러간다. 동수가 한 축이다. 혼자 살면서, 당뇨병으로 고생하면서, 살인 사건의 진범을 뒤쫓는다. 진실이 궁금해서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영화가 추리물, 수사극, 스릴러의 외양을 띠는 이유다. 그러나 동수의 집착은, 사실은, 상처 때문이다. 그는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핑계로 아들을 수사에 개입시켰다가 영원히 잃었다.
미호와 요한은 또다른 축이다. 이게 핵심이다. 두 사람은 독한 상처를 안고 있다. 빛의 세계로 나와서는 안 되는 상처, 끝까지 어둠의 방에 머물러야 할 상처다. 그들은 어린 날의 상처를 발효시켜 복수의 무기로 사용한다. 그 복수와 집착에는 뿌리깊은 이유가 있다. 그래서 살인은 또다른 살인을 부른다.
사건의 발단은 요한 아버지의 '독특한' 성적 취향 때문이다. 여기엔 가난, 돈, 풋사랑, 매매춘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동수가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비정상적인 관계의 전말이 밝혀진다. 미호와 요한의 아픔을 조금씩 이해한다.
영화는 공소시효 만료가 눈앞인 14년 전 살인사건의 진실을 수사하는 동수, 미호와 요한의 슬픔과 복수의 칼춤을 따라간다. 특이한 점은, 느린 템포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초반에 특히 그렇다. 다 이유가 있다.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게 목적이 아니어서다. 대신 미호와 요한의 캄캄한 내면, 그 상처가 곪아서 터지는 과정에 포커스를 맞춘다.
여기서 선택의 고민이 생긴다. 분명히 미호와 요한이 중심 인물이다. 그런데 동수도 함께 껴안고 간다. 한석규라는 배우의 비중 때문인지도 모른다. '백야행'은 그래서 다소 모호해진다. 후반부의 옥상 장면을 보자. 동수가 요한에게 총을 겨누면서 말한다. "미안하다. 그때 너를 잡아주지 못해서"라고 사과한다. 아이러니다. 형사가 범인을 체포하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다니. 그러나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이 대사는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조금 공허하다. 요한의 상처를 더 집요하게 묘사했다면, 동수의 이 대사는 섬광처럼 빛났을 것이다.
'백야행'의 캐릭터는 꽤 매력적이다. 미호가 가장 눈길을 끈다. 그녀는 전통적인 이미지와 다른, 백색의 팜므파탈이다. 실제로 미호는 자주 흰 옷을 입고 등장한다. "나는 모른다"는 미호의 대사는 서늘하다. 치명적인 상처, 빼어난 외모와 능란한 술수, 복수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미호의 내면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런데 영화는 후반부에 페이스가 흐트러진다. 초반에는 말을 아끼면서, 인내심을 요구하면서, 관객을 인물의 내면으로 이끈다. 성공적인 전략이다. 스릴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후반으로 갈수록 자제력을 잃는다. 지나치게 친절하다. 그래서 불편하고, 산만하고, 느슨해진다. 때로는 침묵과 생략이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 기획취재팀>
'백야행'(감독 박신우)은 제목이 많은 것을 암시한다. '하얀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 얘기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빛과 어둠의 삼투압 혹은 충돌이 일어난다. 슬프고 가혹하다. 무엇보다 지독하다. 지독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과거를 파헤치는 '슬픔의 노래'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애잔하게 흐르면서 그 슬픔을 흔들어 깨운다. 그러나 밤에 잠을 못 자면, 정신이 혼미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하얀 어둠'처럼 모호하기도 하다.
미호(손예진)는 빛의 세계다. 겉으로만 그렇다. 요한(고수)은 완벽한 어둠의 세계다. 미호는 재벌총수의 약혼녀다. 요한은 카페 종업원이면서 미호의 그림자다. 미호의 주문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다.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상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4년 전, 인천 앞바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버려진 폐선에서 요한의 아버지가 살해됐다. 그런데 수사는 미궁에 빠진다. 석연찮은 점 투성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형사 동수(한석규)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다가 실패한다. 거의 폐인이 된다.
'백야행'은 두 개의 트랙으로 굴러간다. 동수가 한 축이다. 혼자 살면서, 당뇨병으로 고생하면서, 살인 사건의 진범을 뒤쫓는다. 진실이 궁금해서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영화가 추리물, 수사극, 스릴러의 외양을 띠는 이유다. 그러나 동수의 집착은, 사실은, 상처 때문이다. 그는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핑계로 아들을 수사에 개입시켰다가 영원히 잃었다.
미호와 요한은 또다른 축이다. 이게 핵심이다. 두 사람은 독한 상처를 안고 있다. 빛의 세계로 나와서는 안 되는 상처, 끝까지 어둠의 방에 머물러야 할 상처다. 그들은 어린 날의 상처를 발효시켜 복수의 무기로 사용한다. 그 복수와 집착에는 뿌리깊은 이유가 있다. 그래서 살인은 또다른 살인을 부른다.
사건의 발단은 요한 아버지의 '독특한' 성적 취향 때문이다. 여기엔 가난, 돈, 풋사랑, 매매춘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동수가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비정상적인 관계의 전말이 밝혀진다. 미호와 요한의 아픔을 조금씩 이해한다.
영화는 공소시효 만료가 눈앞인 14년 전 살인사건의 진실을 수사하는 동수, 미호와 요한의 슬픔과 복수의 칼춤을 따라간다. 특이한 점은, 느린 템포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초반에 특히 그렇다. 다 이유가 있다.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게 목적이 아니어서다. 대신 미호와 요한의 캄캄한 내면, 그 상처가 곪아서 터지는 과정에 포커스를 맞춘다.
여기서 선택의 고민이 생긴다. 분명히 미호와 요한이 중심 인물이다. 그런데 동수도 함께 껴안고 간다. 한석규라는 배우의 비중 때문인지도 모른다. '백야행'은 그래서 다소 모호해진다. 후반부의 옥상 장면을 보자. 동수가 요한에게 총을 겨누면서 말한다. "미안하다. 그때 너를 잡아주지 못해서"라고 사과한다. 아이러니다. 형사가 범인을 체포하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다니. 그러나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이 대사는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조금 공허하다. 요한의 상처를 더 집요하게 묘사했다면, 동수의 이 대사는 섬광처럼 빛났을 것이다.
'백야행'의 캐릭터는 꽤 매력적이다. 미호가 가장 눈길을 끈다. 그녀는 전통적인 이미지와 다른, 백색의 팜므파탈이다. 실제로 미호는 자주 흰 옷을 입고 등장한다. "나는 모른다"는 미호의 대사는 서늘하다. 치명적인 상처, 빼어난 외모와 능란한 술수, 복수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미호의 내면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런데 영화는 후반부에 페이스가 흐트러진다. 초반에는 말을 아끼면서, 인내심을 요구하면서, 관객을 인물의 내면으로 이끈다. 성공적인 전략이다. 스릴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후반으로 갈수록 자제력을 잃는다. 지나치게 친절하다. 그래서 불편하고, 산만하고, 느슨해진다. 때로는 침묵과 생략이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 기획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