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 "인구 준다는데 1000만 관객 또 가능할까요?"

2000년 1월1일 0시. 서울 7개관, 전국 17개관에서 '박하사탕'이 개봉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여는 그 상징적인 순간, '박하사탕'의 출발점은 초라했다. "설경구(41)와 문소리 누가 알았겠나. 무명 배우였다. 지금 같으면 투자도 안 될 영화였는데." 10년 사이에 무명 배우 설경구는 '실미도'와 '해운대'를 통해 1000만 영화를 두번이나 만들어낸 한국 유일의 배우가 됐다. 과연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배우가 대한민국에 있을까. 40대 연기파 배우들의 얼굴이 몇몇 떠오른다. 김윤석 송강호 조재현 최민식 등등. 우열을 가리기 힘든 연기의 달인들이지만, 뿜어내는 에너지의 종류는 각기 다르다. 만약 이들 중 누군가 설경구의 자리에 섰다면 어땠을까. '박하사탕'의 명대사 "나 다시 돌아갈래"를 김윤석이 외친다거나 '공공의 적'의 꼴통 형사 강철중을 최민식이 연기하는 거다. 그들만의 새로운 캐릭터가 창조됐을 게 자명하지만, 설경구만의 맛을 지우고 두 영화를 상상하기는 조금 힘들다. '해운대'로 생애 두번째 1000만 관객을 찍은 설경구가 '용서는 없다'(내년 1월 7일 개봉)로 돌아온다. 대체재가 존재하지 않는 그의 연기는 이번 영화를 어떻게 빚어냈을까.

딸 구하는 부검의 역할

정신적 스트레스에 고생 '박하사탕' 가장 여운 남아

▶설경구 류승범 한혜진의 앙상블

'용서는 없다'는 과학수사대 최고 부검의가 그의 딸을 납치한 살인마(류승범)와 벌이는 대결을 그린 스릴러물이다.

설경구는 부검의 강민호 교수를, 그를 돕는 열혈 여형사 민서영 역은 한혜진이 맡았다.

"'해운대'를 찍을 때는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주변에 선후배 연기자들이 많아서 재미있었다. '실미도' 때는 30명 정도의 배우들이 팬티만 입고 만년설이 덮인 산 정상을 뛰어올랐는데 살이 다 찢어졌다. 얼음 직전의 눈이었으니까 거의 면도칼이었다. 그런데도 히히덕 거리면서 참 재미있게 찍었다. 근데 '용서는 없다'는 육체적인 것보다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승범이를 의지할 수도 없으니까. 같이 촬영 있는 날엔 약속한 것처럼 서로 말도 안했다."

▶꽃잎에서 용서는 없다까지

설경구는 1996년 꽃잎으로 데뷔했다. '용서는 없다'까지 총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엔 목소리만 출연한 영화('영매, 산자와 죽은자의 화해')도 있고 비중 없는 단역('러브스토리(1996)')이나 특별우정출연한 영화('내사랑 내곁에(2009)') 등이 포함돼 있다.

설경구는 이번 영화 '용서는 없다'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잔상이 오래 남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수많은 출연작 중에서 설경구 자신에게 가장 여운이 많이 남은 영화를 물었다.

설경구는 주저없이 "박하사탕(2000)"이라고 답했다. "주인공이란 걸 처음 해본 영화이기도 했지만, 너무 센 영화였다. 오랫동안 주인공 남자(영호)의 잔상이 남아있어서 인터뷰를 하다 운 적도 여러번이다. 한번은 기자분이 같이 울어줘서 인터뷰 하다 말고 같이 술을 마신 적도 있다."

설경구는 2000년 '박하사탕'으로 제21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대종상 신인남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남우상 등을 휩쓸었다.

▶'천만'의 영광 다시 한번?

"내가 찍은 게 아니다. 1000만 영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게 영광일 뿐이다."

설경구는 1000만 관객 얘기가 나오자 공을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과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에게 돌렸다.

"'실미도'는 사회적인 논란과 이슈가 있었다. 영화 홈페이지는 추모 물결이 일었고, 관객들에게 일종의 부채의식이 생겼던 것 같다. (관객을 모을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해운대'는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근데 이제 인구가 준다는데 다시 1000만 영화를 할 수 있을까."

< 권영한 기자 champa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