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 페이퍼진] '뉴 문' 계기로 본 영화 속 뱀파이어의 진화

검은 연미복, 캄캄한 밤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 여성의 흰 목을 물어뜯는 날카로운 송곳니, 지하의 관, 불사의 존재, 초능력.... 뱀파이어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이다. 어둡고, 무겁고, 혐오스러운 느낌이다. 뱀파이어가 여성의 피를 빠는 행위는 성적인 상징으로 읽힌다. 이런 이미지는 사실 오래된 것이다. 배우 크리스토퍼 리가 출연했던 70년대 뱀파이어 영화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이젠 뱀파이어도 변했다. 인간과 사랑을 하고, 삶의 의미를 고민할 만큼 이성적이고 지성적이다. 청춘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영화 속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악마, 괴물이었다. 요즘에는 친근하고 밝은 캐릭터로 진화했다. 더 이상 피를 빨아먹는 괴물이 아니다. 10대 소녀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꽃미남이다.

피에 굶주린 악마? 이젠 순정파 꽃미남!

검은 연미복-지하의 관-송곳니 등은 옛말 멜로 주인공-신부…'인간적인' 캐릭터로

지난해 조용하지만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스웨덴 영화 '렛 미 인'은 '아주 오랫동안 12살인'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와 왕따 소년 오스칼의 우정과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 화제를 모았다. 현재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 중인 스페인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브로큰 임브레이스'의 한 장면도 뱀파이어의 변화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영화감독 마테오와 조수는 '헌혈 기관에 근무하고, 여성과 사랑을 나눌 때마다 흥분하는 뱀파이어'를 구상하면서 의기투합한다.

물론 뱀파이어의 전통적인 특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뉴 문'에서도 에드워드는 차갑고, 빠르고, 불사의 존재다. 일부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여전히 원한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악의 화신이자 괴물에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인간과 다르지 않은 캐릭터로 변주되어 왔다. 이 과정을 통해 점점 친숙한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와 국내 영화계의 최대 화제작은 '뉴 문'이다. 꽃미남 뱀파이어 에드워드 컬렌(로버트 패틴슨)과 17세 소녀 벨라 스완(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사랑 얘기다.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트와일라잇'의 속편. 원작은 미국에서 1700만부가 팔린 스테파니 메이어의 4부작 소설 '트와일라잇 사가'이다.

'뉴 문'은 미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달 20일 개봉 첫날 수익이 7000만 달러를 넘어서며 '다크 나이트'를 따돌리고 역대 1위를 차지했다. 또 개봉 주말 수익 3위, 11월 개봉작 수익 1위, 최단 기간 1억 달러 수익도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뉴문'은 흥행 1위를 질주하고 있다. 개봉 일주일만에 100만 관객을 넘었고, 2주 연속 예매율 1위를 기록 중이다. '트와일라잇'의 인기를 뛰어넘고 있다. 경쟁 대작이 없어 당분간 1위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뉴 문'은 특히 10대 소녀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개봉일 관객의 80％ 이상이 여성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이 대부분이다. 별 1개를 준 평론가도 있다. 하지만 놀라운 흥행 성적과 화제성은 그런 비판을 무색하게 만든다.

'뉴 문'은 뱀파이어 영화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 캐릭터의 성격은 기존 뱀파이어 영화의 주인공과 다르다. 에드워드는 보통 사람처럼 학교에 다녔다. 인간의 피를 빨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해치려는 뱀파이어를 물리치는 '착한' 뱀파이어다.

10대 소녀들을 사로잡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에드워드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 못지않은 완소남이다. 대단한 미남이고, 햇빛을 받으면 얼굴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무엇보다 사랑에 목숨을 건다. 여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여인의 피를 빨아 자신의 정기를 보충하던 뱀파이어와 반대다. 에드워드는 벨라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자신의 불멸성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사랑에 관한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뉴 문'이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하이틴 로맨스로 불리는 이유다. 순정파 꽃미남으로 변신한 게 최대 흥행 요인인 셈이다.

전통적인 뱀파이어는 파괴적이었다. 광기에 휩싸인 악의 화신, 피에 굶주린 악마로 등장했다. 1897년 처음 출간된 브람 스토커의 고딕소설 '드라큘라'는 뱀파이어의 대중화를 이끈 작품으로 꼽힌다.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이 1992년 동명 영화로 제작했다. 브래드 피트, 톰 크루즈가 출연했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인간처럼 희로애락을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인 뱀파이어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이후 펑크족 뱀파이어('버피와 뱀파이어'), 동족을 죽이는 뱀파이어('블레이드' 시리즈) 등 다양한 캐릭터로 변주됐다. TV 시리즈 '트루 블러드'는 뱀파이어와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를 그린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뱀파이어는 인간의 적에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바뀌었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공존이 일반화됐다. 오히려 인간에게 테러와 린치를 당하고, 돈벌이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국내 영화 중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 신부 상현(송강호)은 인간적인 존재다. 친구의 아내인 팜므파탈 태주(김옥빈)와 열정적인 섹스를 한다. 종교에 몸담은 신부로서 육체적 욕망으로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 톱10'에 선정됐다. '박쥐'는 같은 뱀파이어 영화인 '뉴 문'을 제치고 10위를 차지했는데, '타임'은 '우리가 선정한 올해의 뱀파이어 영화'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