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카메론은 최소 ‘상업영화의 왕’은 된다
입력 : 2009.12.22 15:25
영화 ‘아바타’
십년 전 쯤에 제임스 카메론이 전 세계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I’m King of the World”.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했어도 면박 받기 딱 좋은 말을 전세계의 시청자를 향해서 뻔뻔하게 제임스 카메론은 했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에 덕분에 욕도 좀 먹은 걸로 기억한다.
‘타이타닉’으로부터 12년 후 제임스 카메론의 차기작 ‘아바타’를 봤다. 십여 년 전 그가 했던 그 오만한 말이 떠올랐고, 분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의 왕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왕쯤은 될 것 같았다. 백번 양보해서 ‘상업영화의 왕’임은 분명해 보였다.
영화 ‘아바타’는 서구 몇몇 국가들이 화려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며, 혹은 반성하며 만들어낸 서구 개척기를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 가운데 하나다. 아메리카 대륙에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인디언족 거개의 절멸을 부른 서구의 개척정신은 지금은 제3세계의 지하자원을 노리더니, ‘아바타’에서는 급기야 우주의 어느 한 행성까지 욕심 내고 있다. 행성의 이름은 ‘판도라’이며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종족은 ‘나비’족이다. 첨언하자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밀려난 인디언의 대표적인 종족은 ‘나바호’ 족이다.
kg 당 20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는 언옵타늄이 엄청나게 매장돼 있는 판도라 행성에 지구에서 온 용병들과 과학자가 기지를 구축한다. 온갖 무기들로 이 행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 대화로 협상을 시도, 그 수단은 인간과 나비족의 DNA를 결합해 만든 아바타다. 갑작스럽게 죽은 쌍둥이 형을 대신해서 하반신 불구 상이용병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가 아바타 조종에 합류한다. 제이크는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 족장의 딸 ‘네이티리(조 샐다나)’를 만나 나비족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네이티리와 사랑에 빠진다.
‘아바타’의 이 사뭇 진부한 스토리는 내내 영화 ‘늑대와 춤을’을 떠오르게 한다. ‘늑대와 춤을’이 서구 군인들의 대공습 직전 주인공들이 피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면 ‘아바타’는 그 이후의 치열한 전쟁까지 담아낸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이제는 인류의 탐욕을 고상하게 치장하는 단어에 더 가까운 '인간의 개척정신', 그 닳고 닳은 이야기를 2009년의 제임스 카메론은 어떻게 마무리지을까.
그런데 '아바타'의 방점은 이야기가 아닌 집요한 ‘이매지네이션(imagination)'에 찍힌다. 1995년에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완성돼 있었던 '아바타' 속 이미지들은 그 구현이 가능할 때까지 영상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10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기나긴 기다림은 실로 완벽에 가까운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지구에 공룡이 살았던 시대를 연상시키는 판도라 행성의 웅장한 밀림과 희한하게 생긴 여러 동물들. 공중을 유유히 떠다니는 산의 위용과 밤이 되면 판도라의 자연을 물들이는 눈부신 형광빛의 향연. 제임스 카메론이 꿈에서 봤다는 이 세계는 최첨단의 영상 기술을 빌어서 스크린에 그대로 재현됐다. 무엇보다 판도라 세계의 황홀함에 정점을 찍는 건 나비족이다.
피부의 모공, 동공의 크기까지 CG화하는 '이모션 캡처(Emotion Capture)' 방식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나비족은 3m에 달하는 신장에 푸른 색 피부, 그리고 매끈한 몸매를 뽐낸다. 판도라 밀림을 자유자재로 날고 뛰는 나비족은 인간의 모습을 초라하게 만든다. 하반신 마비인 제이크 설리는 처음 아바타를 조종한 날,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 두 다리에 감격했다.
이전에도 디지털로 구현된 영화 속 인물들은 많았다. 실제 인간의 모습을 완벽히 구현하려는 그 노력은 눈물겨웠지만 실사와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 사이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괴리가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닮아가는 로봇이 친근하다가도 닮는 정도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되려 섬뜩하게 보인다는 일본의 로봇 공학자 ‘마사히로 모리’의 ‘섬뜩함의 계곡(uncanny vally, 출처 : 책 ‘진중권의 이매진’)에 빠진다는 것이다. ‘섬뜩함의 계곡’에 빠지지 않는 것은 영상 CG 분야의 오래된 숙제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바타’는 그 숙제를 이제 거의 다 풀어낸 것처럼 보인다. 스크린 가득한 나비족의 얼굴에서 섬뜩함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인간 캐릭터보다 나비 캐릭터에 더욱 동화되고, 급기야 그들을 온전히 한 영화의 멋진 주인공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모션 캡처’ 기술의 진보가 큰 보폭으로 대뜸 영화 ‘아바타’를 통해 이뤄진 것이다. 이것은 곧 앞으로 쏟아져 나올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일대 진보를 뜻하기도 한다.
‘아바타'를 보려는 관객들의 걱정은 이 영화가 재미있는가, 없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아이맥스 3D'로 봐야 할지 '디지털 3D'로 봐야 할지, 그냥 일반 스크린으로 봐도 무방한지에 있다. 그리고 '꼭 3D로 보시고요, 입체안경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아요'라는 대답이 십중팔구 돌아온다. 그래서 관객들은 기꺼이 몇천원의 웃돈을 얹어서 3D '아바타'를 만끽한다.
게다가 제임스 카메론은 ‘인류의 개척정신’이 몰아간 인간과 나비족과의 대혈전을 인간의 대패로 마무리 지었다. 한껏 나비족에게 감정이입이 돼 있던 관객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마음 속으로 지른다. 그리고 돈만 아는 인간 탐욕을 반성하며, 통쾌함과 황홀경을 품고 마지막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음악 ‘I see you’를 들으며 감격을 한껏 돋운다.
진부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수많은 사람이 그 비싼 티켓값을 치르고 불편한 입체안경을 쓰도록 만든 제임스 카메론의 능력. 다시 말해서 상상력을 돈 되는 멋진 구경거리로 만들어내는 제임스 카메론의 재능을 또 한번 확인하니, 누가 그를 적어도 ‘상업영화의 신’이라고 추켜세우는 데는 할 말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