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新舊) 간판끼리 대결로 새해 연다

예전에 자신을 '구시대의 막내, 새 시대의 맏이'로 소개한 정치인이 있었다. 이창호와 박정환의 대결을 앞두고 왜 흘러간 정치인의 선거용 구호가 떠올랐을까. 이창호가 조남철·김인·조훈현의 1인자 적통을 잇는 '구시대의 막내'라면 박정환은 무섭게 돌진 중인 10대 스타그룹의 선봉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해 35세가 되는 이창호, 만 17세 생일을 보름도 안 남긴 박정환이 신년 벽두 타이틀을 놓고 격돌한다. 7일 시작되는 제5기 원익배 십단전 결승 3번기다. 새해 첫 결승전인 이번 대결은 두 사람의 '신년 운세'와 더불어 올 한해 바둑계 '앞 물결' 대 '뒷물결'의 주도권 다툼을 내다볼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신분 격차(?) 때문에 그 동안 둘의 맞대결 기회는 단 두번에 불과했다. 2007년 바둑리그에서 이창호가 이겼고, 2009년 1월엔 4기 원익배 준결승서 다시 만나 박정환이 빚을 갚았다. 둘이 정상 무대에서 타이틀을 다투는 것도 물론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 결승 조합은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황금 카드다. 우선 최연소 우승 기록 1·2위 기사 간의 격돌이란 점. 13세1개월 만에 첫 타이틀을 쟁취한 이창호는 최연소 우승 1~10위를 독점하다 지난 1월 그 일각이 함락됐다. 제4기 원익배를 따낸 만 16세의 박정환에게 10위 자리를 내 준 것.

박정환은 13세4개월의 나이 때 프로가 됐다. 11세에 입단한 이창호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지만 2000년대 진입 이후 13세 프로란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동료 프로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가장 촉망되는 신예'에 꼽혔던 박정환은 이듬해 마스터스 챔피언십(비공식 대회)서 첫 우승을 따내 기대에 부응했다.

또 하나는 둘 모두 현재 최상의 컨디션에 올라 있다는 점. 연말 벌어진 명인전과 천원전 두 타이틀을 하나씩 나눠 가졌다. 이창호는 명인 탈취로 올 시즌 4회 연속 자신을 괴롭히던 '준우승 증후군'서 후련하게 탈출했다. 박정환은 천원전 결승서 올해 기록 부문 4관왕 김지석을 셧아웃, 다관왕 반열에 올라섰다. 올해 복수(複數) 우승자는 이들 2명뿐이다.

물론 누적 기록에선 비교가 안 된다. 통산 우승 횟수 138대 3, 통산 승수는 1496승(460패) 대 151승(65패)이다. 랭킹 역시 1위와 12위로 체급(?)이 달라 보인다. 하지만 올해 전적을 보면 이창호(50승26패)가 다승 3위, 박정환(47승15패)은 승률 2위 다승 4위로 팽팽하다. 게다가 박정환은 현재 13연승을 질주 중이다.

이창호는 바둑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후배들의 추격, 건강 이상 등으로 최근 몇년간 왕년의 독주를 이어오지 못했다. 특히 국제 메이저대회에선 4년여 동안 8연속 준우승 중이다. 2월 하순으로 다가온 제14회 LG배 결승(상대 쿵제)서 이 수모를 씻어낼 수 있을지 이번 대결이 힌트를 제공할 것이다.

박정환의 상품 가치는 무한하다. 김기원(93년 11월생)에 이어 240여 국내 프로들 중 아직도 최연소 2위다. 그럼에도 벌써 확실한 가속(加速)이 붙었으니 새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른다. 10대와 30대 간의 신·구 세대 싸움은 그 자체로 얼마나 처연한 '생존 경쟁'인가. 1인당 10분에 40초 초읽기 3회의 속기방식. 5000만원 우승상금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