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여인 자연을 수놓다

10년 만에 열리는 김수자의 국내 개인전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9일 시작됐다. 김수자는 '바늘여인' '보따리'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작가로, 1999년부터 뉴욕을 거점으로 파리와 유럽 등지에서 활동해왔다. 영상설치 전시인 이번 《Earth, Water, Fire, Air(地水火風)》전은 지난 10여년간 해외에서 펼쳤던 그의 작품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검은색 카펫이 깔린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7개의 대형 프로젝션에서 각각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관람객이 처음 맞닥뜨리는 것은 절벽에 부딪히는 거대한 파도와 물보라다. 솟구치던 파도가 떨어지면서 선명한 무지개가 신기루처럼 머물다 사라진다. 다른 화면에서는 화산 지대로 이동하면서 보이는 주변 풍경이 전개되고, 용암재 속에서 석류알처럼 부서지는 불꽃이 이글거린다. 심해(深海)에서 출렁이는 파도는 장중한 교향곡같이 위엄과 무게를 보여준다. 마지막 화면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 맑은 하늘 속에 구름이 가볍게 떠다닌다.

이들 풍경은 스페인의 화산섬과 과테말라의 화산을 중심으로 담은 것이다.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작가는 우주의 근원으로 불렸던 4원소를 상징처럼 영상에 담았다. 작가는 "바람은 그 자체로도 자연의 역동성을 보여주지만, 그 밖에도 4원소 하나하나가 독특한 특성과 함께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들은 각자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면서 자연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김수자는 "자연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연에 눈을 돌린 김수자의 이번 작품은 국내 관람객에게는 새로운 시도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탐구는 그동안 계속 해온 작업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수자에게 바늘과의 만남은 극적이고 중요하다. 1983년 어느 날 작가는 어머니와 이불보를 꿰매다가 전율을 경험했다. 이불보에 뾰족한 바늘을 꽂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우주의 에너지를 느낀 것이다. 평면 작업에 대해 고민하던 작가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작가는 2차원의 세계에서 3차원의 세계를 발견했고, 이후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을 시작했다.

김수자에게 바늘은 도구이자 손의 연장이며, 여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천과 바늘은 수평이면서도 수직의 관계이다. 작가에게 바늘귀는 '허(虛·void)'로서 이곳을 지나는 실은 인간의 영혼 또는 정신을 의미한다. 천을 뚫는 바늘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고 서로 얽혀가는 관계를 나타낸다. 김수자는 "바늘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있는 양성(兩性)이며 공격과 치유의 두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고 말했다.

그의 〈보따리〉시리즈도 바늘의 연장선상에 있다. 천을 펼치면 2차원의 캔버스이지만 매듭을 짓는 순간 보따리라는 입체물이 창조된다. 천은 보따리로 변하는 순간 인간의 이동과 이주를 뜻하는 상징이 된다. 작가는 바늘이나 보따리를 통해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보여줬고, 베니스 비엔날레(1999· 2005), 상파울루 비엔날레·이스탄불 비엔날레(1998) 등과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는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묻고 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이 이글거리던 용암도 흙이나 재로 사그라지는 모습을 통해 인간 욕망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보여준다. 덧없음이 커질수록 생명에 대한 존귀함과 현재의 중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김수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자연을 더 넓고 깊게 성찰하고 전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열린다. (02)544-7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