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선의 시네마 업데이트] '500일의 썸머'

사랑에 빠진 순수청년 …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500일의 기록

　주변에 나이 먹은 언니, 오빠들이 많다. 좀 먹은 게 아니라 실컷 먹은 이들이 여럿이다. 그래도 독야청청하기에 물어보면 다들 아직 운명을 못 만났다고 한다. 혹은 내 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거나 상대가 자꾸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 같다거나 몇 번의 실패한 연애로 운명은 없다고 믿는 경우 등등이다. 그들 모두와 '500일의 썸머'를 보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해보고 싶다. 물론 실현될 리는 없겠지만.

'500일의 썸머'는 500일간 썸머라는 여자에게 빠져 살던 순수청년 톰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 영화는 두 남녀의 이야기지만 둘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한다. 그럼 이게 대체 무슨 얘기? 그게 이 이야기가 지닌 독창적인 사랑스러움이다. 카드 회사 디자이너인 톰(조셉 레빗 고든)은 새로 들어온 사장 비서 썸머(주이 디샤넬)에게 꽂힌다. 그녀는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늘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내공 충만한 타입. 게다가 구속받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평범남 톰이 그녀와 가까워지고 복사실에서 키스를 한 후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한다. 문제는 할 거 다하면서 친구라 우기는 썸머와 그런 썸머를 운명의 상대라 여기는 톰의 시각 차이. 결국 둘은 계속 만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다.

썸머에게 시달린(?) 톰의 기억을 담은 '500일의 썸머'는 사소함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는, 똑똑하고 공들인 영화다. 영화는 톰이 썸머에게 사로잡혀 있던 500일 안에서 현재와 과거, 천국과 지옥을 무수히 오간다. 썸머와 헤어져 지옥에 빠진 톰이 집에서 접시를 마구 깨는 장면과 썸머와 처음 만난 날의 황홀한 기억이 교차되고, 썸머와 다퉜던 날의 기억과 둘이 손잡고 가구 매장을 거닐던 추억이 교차되는 식이다. 세밀한 감정 묘사를 위해 다양한 기법도 동원한다. 썸머와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나면 톰이 출근길에 사람들과 흥겹게 춤을 추는 뮤지컬 신이 등장하고, 썸머에게 절망하면 그의 주변 모든 것들이 지우개로 지워지는 삽화처럼 사라진다. 톰이 썸머와 한 번 헤어졌다 우연히 재회하고 그녀가 연 파티에 갔을 때 화면을 이분할한 방식도 유쾌하다. 그의 기대와 실제 현실을 동시 상영하는 이 장면은 비슷한 순간을 경험해본 이들의 가슴 속을 예리하게 파고들 것이다. 시종일관 '사랑스럽다'는 느낌을 놓치지 않는 '500일의 썸머'는 그렇게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고통을 마음 속 깊이 호소해온다. 주옥같은 사운드트랙을 깔고 수많은 연인들의 물음 "대체 우린 뭐가 문제였을까?"를 대변해주는 이 영화 후반부, 썸머가 그 답을 들려주니 귀 기울여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