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전사(戰士) '계급장' 대신 '장유유서' 택하다

새해를 맞으면서 프로바둑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당장 대국자 좌석 배정문제와 제한시간 관리방식이 변혁을 맞았다. 달라지고 있는 한국기원 풍속도를 들여다봤다.

▲선배 기사, 60년 만에 상석(上席)에 오르다

머리 허연 노장이 출입문 쪽에, 손자뻘 청년은 아늑한 안쪽 자리에 앉아 대국하는 모습을 처음 본 사람들은 혀를 차곤 했다. 프로 세계의 '기사 서열'이란 엄격한 규정 때문이었지만 아무도 이를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해 왔다. 서열은 단(段) 높은 쪽이 최우선이었다. 단위가 같으면 입단 순, 그것도 같을 경우엔 나이가 기준이 됐다. 2003년부터 승단에 성적을 연계하면서부터 '젊은 고단자'들이 쏟아지며 입단 선배들을 속속 추월해갔다.

이런 풍경이 올해부터 대폭 사라진다. 좌석 배치 때 ①입단연도 ②연령 ③단위 순으로 규정을 바꾼 것. 입단까지 늦었던 노장기사들은 여전히 '하석'을 감수해야 하지만 지난주 제2회 비씨카드배 통합예선서 처음 시행한 결과 '볼썽사나운' 장면은 대폭 줄었다. 젊은 기사들은 "그동안 송구했었는데 마음이 매우 편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노장들은 말은 안 하지만 흐뭇한 표정이 역력하다. 윈·윈이 따로 없다.

프로제도 도입 60년 역사에서 단(段)은 기사 실력의 절대적 척도였다. 이번 변화는 표면적으론 단의 권위 추락이란 현실이 반영된 것. 그렇다고 해도 실력사회에서 '계급장' 대신 '장유유서'의 길을 택했다는 건 용기있는 결정으로 평가된다. 시대 흐름을 역행한(?) 이번 결정에 바둑계 구성원들은 너나없이 "잘 했다"고 자평한다.

이 방식은 국내 기전뿐 아니라 한국 주최의 모든 국제 대회에 적용될 예정. 외국 기사들도 우리 잔치에 오면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예외는 남아 있다. 국내 도전기의 경우 타이틀 보유자가 상석에 앉아 먼저 돌을 가리는 종전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 것. 현역 챔피언의 기득권과 권위는 이제 마지막 '성역'으로 남은 셈이다.

▲3시간짜리 바둑의 진화

1인당 3시간짜리 국제 대회인 LG배 소비시간표를 보면 거의 절반 가까이가 '2시간59분'으로 나와 있다. 왜 그럴까. 2시간55분 경과시점에 주어지는 1분 초읽기 5회 중 1분을 넘겨 둔 수가 4번이고, '마지막 1분'으로 끝까지 버틴 경우가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다. 이런 바둑의 실제 사용시간은 3시간은커녕 4시간에 육박한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3시간을 꽉 채운 순간부터 초읽기가 시작된다. 고작 5분이 늘어난 것 같지만 그 의미는 작지 않다. 초읽기란 가외시간(extra time) 개념의 촉진용 장치이므로 제한시간 전량 소진 후부터 계산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또한 실제 사용한 총 소비시간과 매 착점별 사용시간을 모두 초(秒) 단위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수작업에 맡겨지던 시간 관리 문제를 컴퓨터에 접목하면서 이뤄진 변혁이다.

한국 바둑은 지난 60년간 하나부터 열까지 일본 운영방식을 복사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시간55분부터 초읽기'도 그 중 하나. 국내 3시간짜리는 최장고 기전으로 '정통파'란 자부심이 있다. 이들 기전이 '5분 전 초읽기'방식을 채용했던 것도 같은 배경이 숨어 있다. 그랬던 '3시간 기전'들이 이번엔 거꾸로 '일본방식 타파'의 선봉 역을 맡게 된 것. LG배 GS칼텍스배 국수전 등이 이에 해당한다.

기사 좌석 배치건과 초읽기 개편문제 모두 한국기원 기사회에서 쏘아올린 개혁의 신호탄이다. 전자는 경로(敬老)사상, 후자는 왜색(倭色) 탈피 및 합리적 기전 관리가 주제다. "우리 바둑계엔 옛 방식에 머물러 온 것이 너무 많다는 게 대다수 기사들의 생각"이라고 최규병 기사회장은 말한다. 앞으로 더 많은 변화가 쏟아져 나올 조짐이다.